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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24. 2019

골드코스트의 첫날

다른 종류의 숙제와 다짐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골드코스트에 도착했다.


반년 사이 열심히 돈을 모은 그는

98년식 오래된 폭스바겐 골프 컨버터블을 끌고 나를 마중 나왔다.

연식이 꽤 있었지만 차가 있다는 게 좋았고

드라마 주인공처럼 잠시나마 뚜껑을 열고 해안도로를 달려보기도 했다.


이제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회사에 갈 필요도 없고, 돈도 조금 있었다.

날 구속하는 어떤 것도 없기에

모든 게 나의 것이고 핑크빛 행복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그 환상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와르르 무너졌다.


다음날 새벽 5시에 그는 평소와 같이 출근을 했고 나는 낯선 곳에 혼자 남았다.

그곳은 남편이 미리 잡아둔 쉐어하우스였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직접 고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 그는

우리가 직접 렌트를 하기 전까지 잠깐 머물 임시숙소를 잡아두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 3곳 정도의 집을 인스펙션 한 후

각 집의 장단점을 나열하여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그중에서 내가 고른 곳이었다.


아주 잠깐 언니와 방을 같이 쓴 적은 있어도 나는 거의 혼자이다시피 했었다.

그 전날 밤 남편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던 것도 꽤나 불편해서 밤새 뒤척거렸다.


그런 나로서는 낯선 사람들과 집을 공유하는 게 편안할 수 없었다.

방에 한참을 혼자 있다가 집에 아무런 기척도 없는 것 같자 조심스레 거실로 나와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일을 하러 간 것 같았다.

방이 3개, 화장실이 2개인 아파트였고 부엌에 있는 냉장고 1대를 7명 정도가 같이 사용했다.

냉장고에는 각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음료수 병과 반찬통들이 즐비했다.

고층 아파트에서 바라본 골드코스트의 오션뷰, 리버뷰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나는 다시 방에 금새 들어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집의 Wifi가 고장 나서 노트북을 할 수도 없었고,

휴대폰 개통과 은행계좌 오픈, 렌트할 집 알아보기 등등 숙제만 가득한 첫날이었다.

날씨가 좋은데 밖에 한번 나가볼까? 싶다가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 영어도 잘 못하는데. 남편한테 전화도 할 수 없고. 그냥 집에 있자.'며

스스로를 방에 가두었다.


서울에서 다 정리하고 이곳까지 용기를 내서 왔는데

정작 골드코스트에 오자마자

외국에 살아본 적 없는 영어 못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한 후

나는 다시 겁쟁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니 그가 돌아왔고

다른 사람들과 부엌사용이 겹치지 않게 눈치를 보며 저녁 준비를 했고

잠들기 전에는 거의 울먹거리다시피 했다.

'오늘 핸드폰도 안되고 인터넷도 못하고 은행도 못 갔어.. 어뜩해..'

남편은 괜찮다며 내일 하면 된다고 토닥여주었다.


잠들기 전 나는 다짐했다.

내일은 꼭 용기를 내서 은행에 가고 핸드폰을 개통해야지.


서울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숙제와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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