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 않으면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도미노피자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이후로 피자헛, T.G.I.Friday's, 과외, 초등 영어강사, 사무보조 등등
아르바이트의 형태는 달랐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역할이란 것은 항상 동일했다.
20살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순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에 온 30살 때까지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을'이었다. 돈을 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였을까, 20대 때 가장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가 '죄송합니다.'인 듯하다.
잘 모르고, 서투르고, 실수해서 정말 죄송하다고 말한 적도 많았겠지만
회사 규정상 추가 할인을 더 해줄 수 없는 피자 고객님께,
아이들이 각자 사정으로 학원을 그만둘 때 학원 원장님께,
해당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옆자리에 앉아 전화를 응대했기에,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사소한 이유로,
나에겐 1만큼의 잘못과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호주 6년 차,
아직 호주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람 사는 것은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고르게 있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 곳이 좋다고 생각하는 일 중에 하나는 바로
'It's not your fault.'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나에게 그런 습관이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기에 더 무서운 것이다.
카페에서 일할 때
스탬프가 7개 모이면 무료 커피를 제공하는 로열티 카드가 있었다.
작은 사이즈의 기본 커피 제공이라고 아주 작게 적혀있었지만
글씨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인지 손님은 중간 사이즈로 flavor를 추가해서 주문했다.
추가금 1불 40센트에 대한 결제를 요청했고
추가 금액에 대해 알지 못했던 손님이 의아해하여 자세히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I am sorry.'와 함께!
나의 말을 들은 손님은 정말 더 미안한 얼굴로
'Oh, it's not your fault.'라고 응대하며 추가금액을 결제했다.
그저 일례일 뿐이다.
내가 미안한 상황이 아니면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데
'죄송합니다.'가 습관이 되어버린 나는 호주에 와서 'I am sorry.'를 입에 달고 살았다.
더 우스운 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대체 왜! 내가 사과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을의 습관화+낮은 영어 수준+다른 문화'가 함께 만들어내는 결과물이었다.
한국의 카페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라고 가정해보자.
"고객님, 죄송하지만 무료 커피는 작은 사이즈로 기본 커피만 가능하세요.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 아닌가. 아마 정말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죄송하지 않은 죄송.
대체 왜 그들이 죄송해야 하는지 이제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곳에서,
'손님은 왕이다.' 이런 문화는 없다.
친절하게 응대하려 하지만 손님에게 모든 것을 맞추지 않는다.
웨이트리스도, 캐셔도, 부동산 직원도, 은행 텔러도,
정말 개인적으로 실수한 일이 아니라면 'I am sorry.'를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미안하지 않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하지만 고마웁지만 적응하기까지 조금 걸린 호주 생활의 한 조각.
+ 더불어,
죄송하다. 미안하다. 를 입에 달고 살면
정말로 죄송하고 미안했을 때 더 이상 쓸 수 있는 말이 없다.
진심만을 아껴서 말하는 것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