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와 식문화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신혼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사랑하지 않아서', '이해심이 없어서', '좋은 배우자가 아니어서' 등의 깊은 선입견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을 정말 사랑하고,
이해심이 없는 편도 아닌데,
그럼 나는 좋은 배우자가 아닌 걸까.
뭐가 문제지. 아, 너무 힘들다.
우리의 신혼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도 그도 청소를 자주 하고 좋아하는데
나와 그의 청소가 너무나도 달랐다.
그는 꽤 깔끔한 편이다.
나는 꽤 깨끗한 편이다.
이 미묘한 차이로 우리는 몇 달의 시간 동안 잦은 말다툼을 했다.
그에게 청소란 '정리'의 의미였고
나에게 청소는 '살균'의 의미였다.
청소도구를 사러 가면
그는 정리함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나는 세제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였다.
"자. 오늘 같이 청소하자."며 움직임을 시작하면
나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고 쌓여있는 먼지를 제거하고
화장실, 부엌, 샤워실 등을 세제로 닦는 일을 했다면
남편은 청소기를 돌리고 물건들을 각 잡아 정리하고
시야에 거슬리는 물체가 없도록 정돈하는 일을 하곤 했다.
지금이야 같이 청소를 하면 잘하는 부분이 나누어져서
각자의 일을 하면 정리와 살균이 혼합된 완벽한 청소가 마무리되지만
신혼 초기에는 각자의 청소 방식을 두고 서로의 방식이 틀렸다며 꽤나 자주 다투었다.
변기 뚜껑, 치약, 샤워실 물기 제거 등
우리를 싸우게 만드는 위험 요소들이 곳곳에 너무나도 많이 산재해있었다.
나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가게가 오픈하는 경우 꼭 들러 먹어보는 타입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나의 남편에게 음식이란
몸의 에너지를 위한 연료의 수단이다.
배가 고프면 무언가 입 속으로 넣어주면 된다.
그는 뭐든 맛있게 먹는다.
그에게 웬만한 건 다 맛있는 음식이다.
그러므로 딱히 더 맛있는 음식을 추구할 이유가 그다지 없다.
따라서 그는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만 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새로운 가게에 들러 인테리어를 구경하고
메뉴판을 훝어보며 낯선 음식을 먹어보는 경험을 즐겁다.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이것을 이해시키기까지 몇 번의 다툼이 있었다.
'나는 남편이랑 데이트를 하고 싶은 거라구.'
이제 그는 누군가 추천하는 맛집을
주말에 함께 가자며 알아오기도 하고
'우리 이번 주말엔 뭐먹어?'라며 먼저 물어주기도 한다.
전쟁의 값진 결과물이다.
신혼 초기에 나는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각종 밑반찬에 메인 음식까지 만드는
한식대첩을 자주 열곤 했었다.
'남편이 감동하고 맛있게 먹어주겠지?'라는 기대로
매일 열심히 요리를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맛있게 먹어주긴 했지만
언제나 내가 원하는 만큼의 리액션은 돌려주지 않았다.
내가 따뜻한 밥을 주면
'부인 나는 찬 밥을 좋아하는데.'
내가 다양한 반찬을 예쁜 그릇에 담아 주면
'부인 나는 한 곳에 덜어서 먹는 게 좋은데.'
내가 맛있는 국을 끓여주면
'부인 나는 원래 국물을 잘 안 먹는데.'라고 초를 쳤었다.
신경질 나고 짜증 나는 반응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저녁을 차리는 것에 대한 반응이 고작 이거라니.
섭섭했다.
그러나 시댁 식구들을 만나보니
더운 대구 지역의 사람들이라 그런지 진짜로 '찬밥'을 좋아했고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정말로 한 그릇에 슥슥 비벼먹는 '비빔밥'이었고
여전히 짭짤한 국물을 들이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은 한 그릇에 먹을 만큼의 양만 덜어서 상을 차리고
웬만하면 메인 음식 하나만 만들어 1식 1찬으로 식사를 한다.
설거지는 언제나 그의 몫이지만
간소한 상차림에 나도 꽤나 많이 편해졌다.
식비도 확 줄었다.
나의 시간이 많이 보장된다.
요리를 하고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상을 그는 높이 사지 않는다.
물론 매우 고마워 하지만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이상적인 아내 상은 아내라는 역할을 처음 해보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싶은 나 스스로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그는 처음부터 그런 아내를 원한 적이 없었다.
어쩌다 가끔 몸이 아파 저녁을 준비하지 못하면
"괜찮아요. 나가서 먹자. 부인이 밥하는 사람인가 뭐."라고 이야기해준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7첩 반상 위 따뜻한 밥과 국을 앞둔 그가
왜 시큰둥했었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요즘은 그런 남편이 정말 많이 고맙다.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처음이기에
머릿속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머릿속 이상은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나의 욕망이고
현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인의 반응일 것이다.
그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음부터 너무 이상적인 모습을 좇다 보면
결국 나도 지치고 상대도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배우자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파트너이기 때문에
나와 상대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뜨거운 신혼 전쟁 기간이
평화적인 오랜 관계를 위한 공식적 베타 버전인 것은 아닐지
뒤돌아보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