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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16. 2019

베를린, 베를리너

탑승권 부자가 되었다


7월 14일,  조금 씩 더워지던 그 여름의 새벽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 국제선 뺨을 이십 대 후려칠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다. 김포 국제공항이 작은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이야. 서울은 아침부터 안개가 가득 낀 후덥지근한 날씨다. 덕분에 탑승 수속도 마치기 전에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이 상태로 베를린까지 가야 하는데 큰일났다. 내 짐을 수속해주는 어여쁜 아시아나 직원이,    


“고객님, 오늘 하루 연결편이 2편이나 있으시네요-“    


라고 매우 놀라운 어조로 말을 해서(원래 그녀의 말투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다리면서 관찰한 결과 그녀는 비지니스 미소가 장착된 프로였다. )

  

“네... 하네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요. 이티켓 출력한 거 보여드릴까요?” 

“아니요옹-“    


너무나도 즐거운 말투로 됐다고 하여 나도 씨익 웃었다. 허나 한참을 모니터를 붙잡고 있던 그녀가 무시무시한 말을 던졌다.     


“고객님, 짐을 정확히 어디서 찾아서 하는 지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나는 하나도 걱정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지만 내 캐리어를 프랑크푸르트에서 찾아서 독일 입국 심사하고 국내선으로 다시 수속하고 어쩌고 하는 순간 베를린 행 비행기는 그냥 놓치게 된다. 당연히 최종 목적지에서 찾는 걸로 이렇게 저렇게 예약을 했지만 내심 당황했다. 미소를 잃지 않고 모니터를 두드리던 그녀는 마침내 내 짐은 최종 목적지인 베를린 테겔 공항에서 찾게 될 거라며, 혹시 베를린에서 거주 중이신가요? 라고 물어보더니 돌아올 항공권도 있냐고 하여 그렇다고 했다. 처음부터 서류를 줄줄이 꺼내 보여줄걸.     

태국 갈 때는 환승 공항에서 탑승권을 따로 받아야 했는데, 아시아나와 루프트한자가 모종의 협약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베를린까지의 탑승권도 다 뽑아서 줬다. 총 세 장. 오늘 나는 4군데의 공항에 들러야 한다. 탑승권 부자가 되었다.     


서울 김포 공항 - 이제 곧 탑승이 시작된다.     

도쿄 하네다 공항 - 3시간 동안 머물러야 한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 - 거지 꼴을 하고 베를린 행 비행기를 찾아 개처럼 뛰어야 한다.     

베를린 테겔 공항 - 항공사와 날씨가 나를 도와준다면(또는 그 누구도 이 네 곳의 도시에 폭탄을 설치하여 싸그리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 9시 30분에는 베를린의 내 작은 방에 도착할 수 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소냐에게 늦어도 밤 10시 정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미리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     

드디어 오늘 시간을 거슬러 베를린으로 간다. 이렇게 그럴 듯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지만 사실 이미 정신줄을 놓았기 때문에 아까 보안 검색대에서 아이폰을 바구니에 그냥 놓고 출국하러 갈 뻔 했다. 여권과 핸드폰, 지갑 요 세 가지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데, 수면 부족과 과밀한 인구 밀도가 내 혼을 빼앗아갔다(또 남 탓을 하고 있다). 다급한 보안 요원의 부름에 재빨리 폰을 품안에 소중히 넣고 출국 수속을 받았다. 이번 여행 첫 번째 자아비판 시간을 가졌다. 멍청한 짓은 이걸로 끝나야 하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어제 외할머니께서도 여행가면 사람 조심하고 정신 잘 챙기고 다니라고 하셨다. 네 할머니, 이 늙은 외손녀 덕국에서 몸조심하고 잘 놀다오겠습니다. 남의 돈으로는 놀러 다니지 말라고 하셔서 또 뜨끔했다. 어떻게 아셨지? 여행 다녀와서 더 열심히 살게요.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세요. 저도 더 건강해질테니.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한잠 잤다.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프랑크푸르트 행 보딩 시간이 임박했다. 확실히 덕국의 서양인들이 많다. 너무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얼굴이 말이 아니라서 마스크를 썼다. 수상해 보이니까 기침이나 조금 해줘야지. 게이트 앞에 피카츄 디자인의 파자마를 입은 서양남자가 있다. 확실히 독일은 또라이라고 해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일단 이목구비가 굉장히 뚜렷하여 누가 봐도 멀쩡해보이는 놈이었다. 허나 샛노란 피카츄 파자마를 입고 거기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피카츄 귀까지 달린 모자였다.... 내 옆자리에 앉으면 진짜 골 때리겠네. 하지만 그의 의상에 화들짝 놀란 건 나뿐인 듯하다. 도대체 도쿄에서 다들 뭘 보고 들었길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단 말인가. 역시 무서운 나라에 온 무서운 사람들이다.  

  

이제 5분 후면 비행기에 오른다. 방금 전에 루프트한자에서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아 깜놀하여 카운터로 달려갔더니 여권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했다. 테겔 행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엄청 놀랐다. 아까 마신 맥주 때문인지(아마 맞을 거다) 아직도 두근두근하다. 백팩에 바리바리 챙겨온 책을 과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피곤하고 긴장해서 그런가 배도 고프지 않다. 게이트 바로 옆에 하나 있는 카페에서 카드 결제가 안 된다고 하여 그놈의 커피를 못 마셨는데 오히려 잘 된 거 같다.   

 

백 유로를 주고 그나마 다리를 뻗을 수 있다는 좌석을 샀다. 결제 화면에 나왔을 때는 앞좌석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어서 그냥 화장실 바로 뒤에 있는 곳인가 보다 했는데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 바로 뒤다. 그래서 세 좌석에 모니터는 한 대. 앞자리 사람들 얼굴 좀 보고 싶다. 다행히 좌석 옆에 작은 모니터가 딸려 있었다. 근데 어떻게 올리는지 몰라서 그냥 안 쓰련다. 일단 잠부터 거하게 자고 싶다. 약 먹고 와인까지 마셨다.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처방받은 신경 안정제를 먹어도 오늘은 딱히 졸립지 않아서...    


아까 보딩할 때 서서 기다리기 싫어서 대충 사람들 다 들어갈 때까지 버팅기고 있었다. 퍼스트와 비즈니스석 타는 사람들 얼굴을 구경하고 싶었다. 뒷모습만 봐도 부유해보이긴 하더라. 내 생에 언젠가 한 번 타볼 일이 생길까 싶다가도 저 돈이면 더 쾌적한 숙소에서 묵는데 돈을 쓰고 싶다는 결론을 내린다. 항상. 지난 달, 홍콩에서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 안은 사람은 많지 않아도 약간의 흥분이 감지됐는데(공항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이 비행기는 더없이 차분하고 조용하다. 이륙할 때 너무 터프해서 잠시 쫄았다. 이십년 동안 여러 비행기를 타봤지만 이륙하면서 기체가 덜덜덜덜덜덜덜 살벌하게 떨리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비행기 언제 만든 겁니까.     


기장님과 부기장님의 정신건강이 아주 양호하길 바랄 뿐. 번개 같이 몇 년 전 가장 충격적이었던 항공기 사고*가 다시금 떠올랐다. 만약 사고가 나서 비명횡사하더라도 실컷 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면 그나마 덜 억울할 것 같다. 이륙 후 승무원들이 각종 술을 포함한 음료를 서비스하고 나자 다들 얼굴에 활기를 띠고 열정적으로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도 알콜이 들어가야 가동을 하나보다.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옆자리에 앉은 커플은 처음부터 조금 묘했다. 일본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나는 그녀가 마취총에 맞아 독일로 납치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밥 먹을 때가 되어 일어나 독일인으로 추정되는 남편과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남편은 내 여권을 보고 오 자기야, 이 사람 한국 사람인가봐,하고 독일어로 아내에게 말했지만 이미 아내는 마취총을 맞고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기에 그의 말은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의 독일어를 어찌 알아들었냐면 뒤늦게 자리에 도착하여 짐을 올리는 나와 내 여권을 보고 꼬레 어쩌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어서 그런지 아직은 여유가 넘친다. 프랑크푸르트까지 10시간 50분이니 이래저래 계산하면 한 시간 당 대략 10유로 씩 내고 다리를 쭉쭉 펼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러모로 아름답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건재하길.     


이제 겨우 두 시간 지나 8시간 50분 남았다. 기장님이 열심히 액셀을 밟기를 바라고 있다(나중에 보니 꼴랑 십분 먼저 도착해놓고 너무 자랑스럽게 말해줘서 어이가 없었다. 한국이라면 가당치도 않을 말이다. 하루 정도 빨리 오는 거라면 모를까). 하네다 공항에서 건너편 의자의 남자가 냅다 눕길래 나도 이때다!하고 그냥 누워버렸다. 눕기에 최적화된 의자임에도 아무도 눕지 않아 허리병으로 고생하는 나는 조금 당황했다. 왜 아무도 널브러져 있지 않지? 이렇게 크고 의자가 많은 대형 공항에서? 잠시 누워서 허리를 쭉 펴고 있자니 긴 비행을 버틸 힘이 조금 생겼다. 입식도 좌식도 아닌 와식 생활이 최고인 것이다.    


엉덩이가 아려온다. 


*저먼윙스(Germanwings) 9525편 추락 사고. 2015년 3월 24일, 부기장의 고의 추락으로 인해 승객 144명과 승무원 6명, 총 150명 전원이 프랑스 남부 알프스 산맥에서 사망했다. 당시 항공기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떠나 독일 뒤셀도르프로 향하던 중이었다.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우울증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던 부기장 안드레아스 루비츠의 고의 추락으로 밝혀졌다. 당시 뉴스를 접하고 앞으로 루프트한자는 타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일정과 가격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국적기를 이용하기엔 다소 가난했고 시간은 많았으며, 어차피 죽을 사람은 뭔 짓을 해도 죽는다는 신념으로 무장했다. 허나 여행자보험은 가장 비싼 걸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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