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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18. 2019

베를린에서는 페르시아 음식을.

7월 23일 

1920년대 테마의 베를린 투어 호스트가 일정을 앞당겨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자고 하여 일정 변경했다.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그 분위기를 체험해주고 싶어서 바꾼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자기가 귀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은성언니와 잠시 카톡하고 새로 생겼다는 한국 식당에 열심히 걸어갔다. 닫음.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하여 어제 가고자 맘먹었던 페르시아 레스토랑인 나피스*에 왔다. 아니 평일 이 시간에 버스 안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이여. 구글신의 도움으로 식당에 도착했다. 페르시아 음식은 태어나 처음 먹는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베를린에 와서 페르시아 음식을 먹고 있자니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 메뉴 이름이 너무 생경하여 메뉴판을 보고 그럴듯해 보이는 음식을 시켰다. 이주민이 많은 도시답게 베를린 시내에는 터키, 시리아, 요르단, 그리스 등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접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자주 보이는 메뉴는 바로 되너 케밥과 팔라펠. 어느 식당에나 사람들이 가득 해서 먹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나중에 팔라펠은 먹어봤지만 길거리 키오스크에서 사서 먹어야 하는 되너 케밥은 시도하지 않았다. 까탈스러운 식습관 때문이 아니고 다들 친구들끼리 옹기종기 앉아서 먹는데, 오도카니 홀로 앉아서 혹은 서서 먹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베를린에 와서 그 유명한 되너 케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입니다. 에헴.      


페르시아 음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쇠꼬치에 꿰어서 구운 각종 고기와 찰기가 적은 밥. 독일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극동 아시아에서 온 내게 식당 주인과 직원들은 하나하나 설명해가며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독일어라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 동양인 여자가 어떻게 알고 우리 식당에 다 들어왔지?하는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알 수 있었다. 밥과 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니 돌아다닐 기력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카페인과 설탕이 필요했다.  

         

당 보충을 더 하고 싶어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엄청나게 화려한 라떼와 티라미수를 후식으로 먹었다. 그동안 리타언니와 카톡을 했다. 언니는 아까 월차를 내고 친구와 난생 처음 사주를 봤는데 점쟁이 말로는 평생 잘 먹고 잘 살 팔자이나 남자는 없다고 했다. 은근 좌절한 언니에게 그 반대는 정말 끔찍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오늘은 동독 박물관에 가볼 생각이다. 아무래도 미술관은 이제 영 내키지 않는다. 관광객들도 오지게 많을 것 같고. 그런데 이 더위를 뚫고 간 동독 박물관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이 땡볕에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어 다른 박물관*으로 향했다. 현아씨 말로는 예쁘고 하등 쓸데없는 가구들이 많아서 감동적이라고.      


박물관의 전시 자체는 무척 좋았으나, 직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티켓 가격을 물어보는 내게 직원 아줌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나와 있으니까 보라고.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 없는 한가한 박물관에서 직원이 할 법한 대응은 아니었다. 내가 8유로나 내고 또 남의 나라 돈 벌어주는 호구짓하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상했다. 빡친 김에 피어싱을 하고 싶어 검색에 돌입하고 몇 군데 괜찮은 곳을 찾아냈다. 몇 년 전에 생긴 버릇인데 스트레스를 받거나 짜증이 나면 귀를 몇 군데 뚫곤 했다. 한동안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는데 베를린도 왔겠다, 귀도 다시 막혔겠다, 관람객을 만만하게 보는 아줌마도 봤겠다, 다시 피어싱을 하고 싶었다. 내일 무자비하게 귀를 뚫어버리겠다 다짐했다.  

 

흥미로운 작품은 많았다만...

   



미래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정신없이 자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갔다. 8시인데도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갔던 식당에서 팟 타이를 먹었다. 사장님이 또 왔냐며 반갑게 알은 척을 해서 앞으로 매일같이 가야지 다짐했다. 나는 이렇게나 쉬운 인간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어제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자 아이패드를 들고 단트라에 갔다. 한창 일기를 쓰고 있는데 매번 마주치던 이 동네 남자와 또 만났다. 예쁜 검정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그의 이름은 루드빅. 안면을 튼 지 대략 네 번째가 되어서야 이름을 알게 됐다. 그 다음다음날도 루드빅을 만났는데 그때 봤던 그 예쁜 강아지는 어딨어요? 지금 산책 데리고 나오면 안됩니까?하고 물었더니 얼마 전에 전여친이 본인 집에서 이사 나가면서 강아지는 일주일 단위로 맡아서 키운단다. 마치 이혼한 커플이 아이 돌보는 것마냥.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고 나는 또 사과를 했다. 베를린은 수많은 전여친들과 전남친들로 가득 차 있다.      


막스한테 이번 주 토요일에 열릴 게이 프라이드를 어디서 봐야 좋은 것인지, 즉 핫스팟이 어딘지 물었더니 내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 퍼레이드를 그저 바라본다는 것이 의아했나보다. 본인은 보통 퍼레이드를 보다가 함께 참여한다고 했다. 그 뭐냐 카퍼레이드에 쓰는 차량에 같이 올라가서 춤을 추고 논다고. 사람들이 길에서도 마구 춤을 춘다고 해서 약간 놀랐다. 길에서 사람들이 같이 춤도 춘다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구경하는 쪽은 보통 가만히 있었는데. 13년 전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디엠만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노무 힙스터들. 음악씬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시시콜콜한 주제로(주로 좋아하는 영화와 배우들) 미친 듯이 떠들고 목이 잠길 지경이 되어 새벽 2시에 들어왔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살금살금 들어오던 레니를 보고 얼른 현관문을 열어줬다. 이거야 원 엄마한테 안 들키고 새벽에 몰래 들어오는 웬수 바가지 남매 같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의 진정한 승자는 터키에서 오셨다는 이웃의 한 할머니였다. 엄청난 양의 맥주를 때려 마시며 미동도 하지 않고 책을 읽으셔서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보며 막스는 또 빵 터졌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할머니는 책을 읽고 계셨다. 대체 집에 언제 들어가셨을까. 내일 또 가서 물어봐야지.


*nafis 메뉴는 다양하지만 다들 꼬챙이에 꿰서 구운 고기에 사프란색의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을 먹는다. 에피타이저로 생양파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처음 맛 본 페르시아 음식은 감탄이 나올 만한 맛이었다. 구글 리뷰도 굉장히 좋으니 관심이 있다면 시도해보자. 


* Café Peri 집이 있었던 골목 모퉁이에 있는 거대한 카페. 메뉴도 맛도 평범하지만 늘 시끌벅적한 곳이다. 


* Bröha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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