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
어제 흥청망청 술을 마셨던 탓에 숙취로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어찌저찌 정신을 차리고 종종 가던 베트남 식당에 갔다. 점심시간을 피해서 갔더니 나처럼 혼자 밥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사장님(쿵푸허슬의 바로 그분 같은)이 내 얼굴을 확실히 알아본다. 오늘은 삶은 국수에 베트남식 샐러드를 섞은 음식과(이름을 모르겠다) 스프링롤도 시켰다. 계산을 하는데 어제 바에서 만났던 동네 주민과 마주쳤다. 엥 니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으로 어색하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주 가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베를린에 아는 사람이 하나 둘 생기고 있었다.
오늘 베를린의 최고 기온은 34도. 물난리로 요란한 서울은 대강 28도였다. 리타언니 말로는 너무 습하고 비가 많이 와서 마치 생선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베를린은 지옥불처럼 끓고 있다고 했다. 카페에서 3시간 정도 머물며 하루키의 에세이를 마저 읽고 밀린 일기를 썼다. 당연히 그늘 아래 있었는데도 너무 더워서 미칠 것 같았다. 오자마자 아이스 라떼를 시키고 후룩후룩 다 마시고 난 후에는 로제 와인을, 마지막으로 얼음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에 아이스크림 넣어 달라고 했더니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직원이 씩 웃는다. 내가 개처럼 헥헥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의 귀엽고도 살짝 귀찮은 요소가 하나 있는데(사실 내가 찾아낸 게 이거 한 단어 밖에 없다), 이들은 얼음 조각도 아이스라고 하고 아이스크림도 아이스라고 한다. 지난 주말에 커스틴과 놀다가 배웠다.
“엥? 그러면 헷갈리잖아?”
“그렇긴 한데, 뭐....(우물쭈물)”
“그럼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크림이라고 안하는 거야?”
“응 그렇게는 말 안해.”
“헐”
처음에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니 직원이 내가 원하는 것이 얼음이 들어간 커피인지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커피인지 재차 확인했다. 만약 ‘아이스’라는 단어의 활용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면 갑자기 왠 아이스크림을 찾냐고 물어보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아나 하면서 투덜댔을 거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스가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에헴. 마지막으로 배달된 아이스크림과 커피로 당충전을 하고 바로 옆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보다 아주 약간 시원했다. 놀이터에 꼬꼬마 아가들이 여럿 놀고 있었다.
그 중 한 꼬맹이가 잘 놀다가 갑자기 뭐에 수틀렸는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보노보노처럼 엄청 서럽게 울었다. 부모님들은 그 아기를 달래거나 혼내지 않고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는 대략 1분 정도 울고 부모님이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자 뚝 그쳤다. 그리고 대략 한 시간 동안 엄청 즐겁게 잘 놀고 있다.
또 다른 부부는 아이만 대략 5명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아이는 5살 혹은 6살 정도로 보였다. 편의상 토마스라고 하자. 토마스는 엄마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와중에 혼자 자신의 책가방을 착착 정리하더니 스스로 착, 가방을 멘 후에 가방 끈에 달린 장치까지(그러니까 안전 벨트같은 느낌의 장치가 있었다. 가방 무게 때문에 뒤로 넘어가지 말라고 막아주는 그런 거) 채운 후에 동생들 유모차 옆에 주차된 자신의 쪼끄만 자전거 지지대를 착 하고 올린 다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자전거에 올라타고 부모님과 함께 떠났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헬멧도 자기가 알아서 썼을 거다.
또 다른 아빠는 두 살 정도로 보이는 딸과 함께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조금 버거워 보이는 놀이기구에서 애가 낑낑대고 있어도 바라보기만 할 뿐 위험하니까 내려오라거나 혹은 본인이 미끄럼틀 위로 올려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저러다가 애기가 실수로 떨어지면 어쩌지?하고 걱정하는 건 이 놀이터에서 나 밖에 없는 듯 했다.
이곳의 부모들은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하도록 냅둔다. 독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경유지로들렀던 하네다행 비행기에서 목격한 내 옆의 모녀는 이들과는 정반대였다.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로 보였고, 엄마는 기내식의 뚜껑을 다 열어서 아이가 먹기 편하도록 모든 걸 다 했다. 심지어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여줬다. 대신 씹어줄 수 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첨언하자면 아이한테 아무런 장애는 없어보였다. 아마 이십 년 후의 입사 면접 때 틀림없이 따라갈 것이다. 오백원을 걸겠다.
내 옆 벤치에 앉은 어린 커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충 듣기로는(영어로 대화하더군. 남자애가 교환 학생같았다) 남자가 여자가 원하는 만큼의 배려를 해주지 않아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마구 징징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나쁜 남자한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야, 쟤 인상이나 하는 짓을 보니 별로다. 너도 그만 매달리고 그냥 대충 데이트나 하고 맥주나 마시고 그만 끝내. 하지만 그 여자애는 그만 두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저주하겠지.
내일 예정된 ‘사회학자와 함께 하는 베를린 퀴어 컬처 투어’가 취소되었다. 트립이 일방적으로 바로 전날 취소된 것도 벌써 두 번째라, 그리고 찬양하는 리뷰 일색이었던 터라 지금 매우 빡쳤다. 에어비앤비는 급성장한 회사라 그런지 여러 문제가 많다. 나는 대체로 이런 서비스에 불만이 생겨도 고분고분하게 반응한다. 허나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분노에 찬 피드백을 남겼다. 트립이 호스트의 사정으로 일방적으로 취소된 것도 두 번째이며 그것도 바로 전날 취소되어 나는 내 하루 일정을 완전히 망쳤다. 물론 굉장히 불쾌하다. 이런 무책임한 호스트에게 페널티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나 같은 이용자에게는 일종의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냐. 빠른 답변 기다리겠다*.
몇 달 전 에어비앤비의 내 계정이 털려서 어떤 미친 새끼가 내 카드를 미친 듯이 긁었다. 새벽 6시 경에 삼성카드 직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다급한 목소리의 직원이 지금 해외에서 고객님의 카드가 수상쩍은 패턴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일단 승인 거절은 되었고 빨리 도난 신고를 해야 하니 고객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의 속사포 같은 설명에 잠이 덜 깬 나는 어버버하며 도난 신고를 완료했고 8시에 에어비앤비 고객 센터가 문을 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내 계정이 털려서 미화 900불 달러가 승인됐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세상 친절한 직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곧바로 문제 해결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날 바로 샌프란시스코 본사의 담당부서장에게서도 사과 메일을 받았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없이 잘 마무리됐고 그때 기억 때문에 에어비앤비로 베를린 숙소를 예약하고 각종 트립까지 다 잡았던 건데. 그런데 이 망할 베를린의 트립 호스트들이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나 지멋대로 투어를 취소한 뒤 사정을 설명하는 사과 문자 한통 없다. 네 이 인의예지를 모르는 괴악한 오랑캐 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벅벅 이를 갈며 저녁으로 부리또를 먹으러 나갔다. 맥주와 함께 배를 가득 채워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점찍어둔 근처 바에 가서 책이라도 읽을까 하고 찾아갔는데 도저히 책을 읽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대강 훑어본 다른 수많은 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 여기 와서 딱히 관광다운 관광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너무 더워서 그런가. 카페나 식당에 가득 찬 사람들이 다 밝고 건강하고 행복해보여서? 나보다 더 외롭고 시시하고 허접한 인간은 이 도시에 없는 것 같아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약을 먹고 얌전히 자야겠다.
*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에어비앤비 네 이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