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월요일. 오늘도 덥다. 비올 확률이 50프로나 되지만 이제 날씨 앱은 믿지 않기로 했다. 이놈의 나라 어디에서도 에어컨은 찾을 수 없다. 조금 멀리에 위치한 브뤼케 미술관에 가려고 계획했지만 박물관이고 뭐고 찬바람 쌩쌩 나오는 에어컨 앞에 앉아 수박화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짜 마시고 싶다. 이 미친놈의 나라. 미친놈의 날씨. 이 날씨 때문에 관광객이 조금이라도 몰릴 것 같은 곳은 절대로 가지 않는다. 방콕과 타이페이의 반복이다. 심지어 거기서도 안 물리던 모기를 여기서 계속 물리고 있다.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모기 파리 말벌 같은 벌레들이 마구 출몰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필요 없을 줄 알고 모기 기피제는 안 가져왔다. (아잉 무슨 7월 베를린에 모기가 있겠어- 이렇게 여유를 부리던 한 달 전의 나를 때려주고 싶다)
더위에 의욕 상실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늘 가던 카페에 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베를린이여 안녕] 영문판을 읽었다. 한글 번역본을 먼저 읽었더니 딱히 어렵지 않았다. 근데 너무 더워서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선크림은 땀이 되어 국물로 줄줄 흘러 내린지 오래였다. 다음 주 서울 날씨를 보니 이번 주 베를린보다 더 더울 예정이었다. 올 여름 나는 폭염의 신과 함께 하고 있다. 망할.
나의 꿍얼거림을 하늘이 들었는지 드디어 비가 온다. 여행 중에 간절히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 것도 처음이다. 비오는 베를린의 풍경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그리스 레스토랑 크레타*에서 기로스를 먹고 바로 옆 나흐바*에서 롱 아일랜드 아이스 티를 마시며 글을 썼다. 한참 지난 일기 문장을 고치는 와중에 음료를 잔뜩 들고 있던 직원과 한 손님이 부딪혀 수많은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난리에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으나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내 비명 소리는 묻혔다. 이런 날도 있는 것 일테지. 비가 와서 시원하긴 한데, 습한 와중에 에어컨 있는 장소는 단 한군데도 없어서 아까 밥 먹다가 땀샘이 폭발했다. 더워서 미칠 뻔했으나 옆 테이블의 예쁜 여자애가 나를 신기한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기에 애써 우아한 척 하며 앉아 있었다. 안녕, 나는 전 세계 36억 8천만명 중의 한 명이란다. 앞으로 살면서 너도 종종 만나게 될 인종이지. 비록 이 동네에는 몇 명 없다만.
바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면 은근 바텐더가 신경써줄 때가 있다. 헛 저 중국 여자, 어쩌면 꽤 유명한 가이드북 저자 혹은 여행 작가 일지도 몰라. 이런 조심스럽고도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다가와 우리 가게 분위기는 어떤지 주문한 음료는 입에 맞는지 등등을 물어보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우쭐대는 표정으로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하고 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미안 아즈씨, 난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잔뜩 쓰고 있어요. 그래도 신경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왜 옛날에 기자 명함이 있으면 그렇게나 으스대는지 이제야 알겠다. 한참 전에 태어나 조선일보 기자할 걸 그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주 멋진 도자기 공방을 발견했다. 지난봄에 깬 머그컵을 보충해야 한다. 한국 가기 전에 사야지.
일단 뭐라도 좀 하자.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다.
* Restaurant Kreta 역시 아는 음식이라곤 기로스 밖에 없어서 그리스 맥주와 함께 먹었다.
* Nachbar 이웃이라는 뜻이다. 야외 좌석은 빈 곳이 없어 실내에 앉았는데 엄청 어둡고 음악 소리가 커서 절로 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