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Aug 20. 2019

미친 놈의 나라, 미친 놈의 날씨

7월 29일 

월요일. 오늘도 덥다. 비올 확률이 50프로나 되지만 이제 날씨 앱은 믿지 않기로 했다. 이놈의 나라 어디에서도 에어컨은 찾을 수 없다. 조금 멀리에 위치한 브뤼케 미술관에 가려고 계획했지만 박물관이고 뭐고 찬바람 쌩쌩 나오는 에어컨 앞에 앉아 수박화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짜 마시고 싶다. 이 미친놈의 나라. 미친놈의 날씨. 이 날씨 때문에 관광객이 조금이라도 몰릴 것 같은 곳은 절대로 가지 않는다. 방콕과 타이페이의 반복이다. 심지어 거기서도 안 물리던 모기를 여기서 계속 물리고 있다.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모기 파리 말벌 같은 벌레들이 마구 출몰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필요 없을 줄 알고 모기 기피제는 안 가져왔다. (아잉 무슨 7월 베를린에 모기가 있겠어- 이렇게 여유를 부리던 한 달 전의 나를 때려주고 싶다)     


더위에 의욕 상실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늘 가던 카페에 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베를린이여 안녕] 영문판을 읽었다. 한글 번역본을 먼저 읽었더니 딱히 어렵지 않았다. 근데 너무 더워서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선크림은 땀이 되어 국물로 줄줄 흘러 내린지 오래였다. 다음 주 서울 날씨를 보니 이번 주 베를린보다 더 더울 예정이었다. 올 여름 나는 폭염의 신과 함께 하고 있다. 망할.   

  

나의 꿍얼거림을 하늘이 들었는지 드디어 비가 온다. 여행 중에 간절히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 것도 처음이다. 비오는 베를린의 풍경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그리스 레스토랑 크레타*에서 기로스를 먹고 바로 옆 나흐바*에서 롱 아일랜드 아이스 티를 마시며 글을 썼다. 한참 지난 일기 문장을 고치는 와중에 음료를 잔뜩 들고 있던 직원과 한 손님이 부딪혀 수많은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난리에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으나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내 비명 소리는 묻혔다. 이런 날도 있는 것 일테지. 비가 와서 시원하긴 한데, 습한 와중에 에어컨 있는 장소는 단 한군데도 없어서 아까 밥 먹다가 땀샘이 폭발했다. 더워서 미칠 뻔했으나 옆 테이블의 예쁜 여자애가 나를 신기한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기에 애써 우아한 척 하며 앉아 있었다. 안녕, 나는 전 세계 36억 8천만명 중의 한 명이란다. 앞으로 살면서 너도 종종 만나게 될 인종이지. 비록 이 동네에는 몇 명 없다만.     

 


바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면 은근 바텐더가 신경써줄 때가 있다. 헛 저 중국 여자, 어쩌면 꽤 유명한 가이드북 저자 혹은 여행 작가 일지도 몰라. 이런 조심스럽고도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다가와 우리 가게 분위기는 어떤지 주문한 음료는 입에 맞는지 등등을 물어보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우쭐대는 표정으로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하고 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미안 아즈씨, 난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잔뜩 쓰고 있어요. 그래도 신경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왜 옛날에 기자 명함이 있으면 그렇게나 으스대는지 이제야 알겠다. 한참 전에 태어나 조선일보 기자할 걸 그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주 멋진 도자기 공방을 발견했다. 지난봄에 깬 머그컵을 보충해야 한다. 한국 가기 전에 사야지.     



일단 뭐라도 좀 하자.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다.



* Restaurant Kreta 역시 아는 음식이라곤 기로스 밖에 없어서 그리스 맥주와 함께 먹었다. 

* Nachbar 이웃이라는 뜻이다. 야외 좌석은 빈 곳이 없어 실내에 앉았는데 엄청 어둡고 음악 소리가 커서 절로 흥이 난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스는 얼음이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