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
화요일. 어제 내린 비 때문에 기온이 확 떨어졌고 하늘은 아주 흐리다. 날씨가 맑지 않다는 것만으로 용기백배하여 조금 멀리 있는 브런치 카페*로 밥을 먹으러 나갔다. 토마토 소스에 계란 2개를 올려 오븐에 달군(?) 요리를 먹었다. 이름이 꽤 독특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네. 날씨가 시원한 것만으로도 며칠 동안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요리를 기다리며 간만에 따뜻한 라떼를 마셨더니 속이 뜨끈해졌다. 해장국을 먹는 수준이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아침에 뜨끈한 걸 먹어줘야돼. 단편 소설 수업을 듣고 있다는 현아씨에게 근황을 물어봤다.
“현아씨, 소설 수업은 잘 되가요? 분량은 어느 정도 써야 해요?”
“다음 주에 마감인데 망했어요. A4 10장정도 쓰던데 저는 아직 5장 밖에 못 썼어요.”
마감이 글을 쓰게 한다는 그럴 듯한 말로 현아씨에게 용기를 주며 곧 만나기를 약속했다. 지난 주말부터 너무 피곤해서 지쳐서 아무 데도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과 정원은 꼭 보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 정원에 들어서니 갑자기 햇빛이 났다. 한참 나무 사이에 난 길을 걸어 다니며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귀찮다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강아지들의 출입도 자유롭기 때문에 마실 나온 귀여운 강아지들도 종종 보였다. 그 중 한 마리는 잔디밭에 서식하는 다양한 곤충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주인이 부르면 또 총알같이 뛰어갔다.
한참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벨베데레(Belvedere) 궁전을 발견했다. 궁전이라고 지칭하기도 뭐할 정도로 아주 규모가 작은 아담한 저택이다. 178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궁전에서 업무 보다가 잠시 도망 나와 놀았다고 하는 아지트 같은 장소다.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다고. 민트색의 둥근 지붕과 파스텔 톤의 외벽이 보는 이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정원 근처로 가는데 호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까이 갔다. 오리는 몇 마리 봤는데 백조들도 많았다. 방문객들이 먹이로 추정되는 뭔가를 백조와 오리들에게 뿌려주고 있었다. 실제로 본 백조는 정말 거대하고 은근 무서웠다. 앞에서 알짱거리면 물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와 독일어로 욕을 하며 머리를 쫄 것 같았다.
베르사유 궁전에 영감을 받아 건축되었다는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대해 검색을 하던 중 이런 리뷰를 발견했다. 베르사유 궁전 기대하면 실망할 겁니다,라는 단호한 감상. 나는 이런 식의 리뷰를 읽으면 기운이 빠진다. 다소 거만하고 폭력적인 느낌마저 받는다. 경복궁에 대한 리뷰에 ‘자금성 기대하면 실망할 거임’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장소나 박물관 혹은 미술관이 본인의 취향에 맞지 않거나 기대에 못 미친다고 혹평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답답하다. 당신에게 볼 거 없는 미술관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전시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동안 유럽에 왔다고 하지만 찍은 사진이라곤 그래피티와 맥주잔 정도라 오늘은 풍경 사진을 제법 찍었다. 그 중 궁전의 전경이 그럴듯하게 담긴 사진을 리타언니와 쭝궈언니가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영국식으로 잘 정돈되었다는 궁전 뒤편의 정원에서 바라본 풍경이 특히나 아름다웠다. 언니들 안녕하신지요. 유럽 느낌이 나는 사진 보여드립지요. 우리 셋은 갑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할 때가 있는데 오늘 오후가 딱 그런 날이었다.
나 “언니들 그럼 굿밤이에요.”
리타언니 “안나 즐겁게 살아!! 멋진 사진이다.” 갑자기 나를 응원하며 사진을 칭찬한다.
쭝궈언니 “맛난 거 먹어. 나는 돼지 갈비 먹고 똥방구 중” 갑자기 본인의 장건강에 대해 보고 한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내가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한다. 언니들 알러뷰. 갑자기 사랑 고백하지 말라며 쭝궈언니가 새로 산 자동차 ‘돌궐이’ 사진을 올린다. 우리 셋을 합치면 완전체가 되었다. 집, 차, 직장, 남편과 (이상한) 시집까지. 이 이상 더 바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한테는 다 가진 친구들이 있으니까.
한참 산책을 하다 슬슬 더워져서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아파트 1층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는데 중딩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서넛 지나갔다. 그 중 통통한 녀석이 할로, 하고 인사를 했다. 나도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그 녀석이 다시 니 하오- 라고 했다. 굳이 거기에 응답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무시했다. 옆에 있던 더 똑똑해 보이는 녀석이 야 무턱대고 니 하오 라고 하면 어떡해, 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통통한 녀석이 아니 니 하오가 인사말이 맞아!라고 대꾸하는 것 같았다. 늘 강조했듯이 어느 정도 일정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고 10년 정도 직장에서 구르면 생판 처음 듣는 말도 제스처와 표정과 그 당시의 상황으로 대강 유추할 수 있다.
그래, 니 생각에 모든 동양인들이 중국인으로 보이겠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당장 세상이 무너지거나 전염병이 돌지는 않아. 그렇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36억명이 넘는 동양인들이 있고 그 중 약 14억명이 중국어를 한단다. 그러니 다음부터 동양인을 만나면 너희 나라 인사말로 끝내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일거야.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많거든. 내가 한국 레스토랑에서 봤던 사장님은 말야, 누가 봐도 한국 사람처럼 생겼지만 한국어는 단 한마디도 못하더라고. 당연히 한국어를 할 줄 알거라고 생각하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가 영어로 대답하던 사장님을 본 그 순간 내가 정말 부끄러웠어. 너한테도 그런 부끄러운 순간이 언젠가는 오길 바란다.
간만에 만난 엘라와 잠시 놀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섰다. 어쩐지 오늘은 날 보고 짖지 않는다. 아까 아침 겸 점심을 매우 부실하게 먹었던 탓에 오후가 지나자 참을 수 없이 식욕이 몰려왔다. 오늘 저녁은 무조건 쌀국수다. 그것도 볶음면. 늘 가던 데 갈까 하다가 조금 멀리 떨어진 식당이 구글 평점이 엄청나게 높아서 무려 버스까지 타고 찾아갔다. 나는 혼자 밥 먹으러 가는데 버스까지 타고 찾아가는 성질이 아니다. 그렇지만 말도 못하게 맛있다는 그 식당에 가서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 디딜 틈 없이 핫했던 그 식당*은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던 볶음면과 전혀 달랐다. 분명히 똑같은 메뉴를 시켰는데도 식당에 따라 요리를 만들어 내오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사장님은 베를린에서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친절했지만 앞으로 또 볼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먹던 대로 먹어야지 갑자기 막 바꾸고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사이공 맥주를 잔뜩 들이 키고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늘 가던 카페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묘한 지름길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럴 수가, 양쪽에 고등학생 일진 무리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약쟁이 홈리스(얘네는 막 구걸도 직접적으로 한다)와 스킨헤드족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바로 이 고딩 일진들이다. 태연한 척 슬슬 걸어갔더니 갑자기 그 무리 중 한 남자애의 남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녀석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독일어인지 뭔지 여튼 알 수 없는 말로 지껄였다. 느낌상 욕을 한 건 알겠는데, 얘가 나한테 무슨 욕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무슨 말인지 그 소리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너무 낯설어서 방금 들어놓고도 바로 까먹었다.
그 놈은 11살 정도로 보이는 완전 어린이였다. 아마 길 양 쪽에 일진 남학생들이 없었다면 네 이 놈, 지금 무슨 말을 씨부렸냐고 붙잡고 물어봤을 거다. 허나 나는 겁이 굉장히 많다. 절대 외국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물론 내가 하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그 자식이 똑똑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똑똑하게 인생을 살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형님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내 주변에 보통의 독일 사람들이 있었다면 다짜고짜 어른인 내게 욕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이렇게 어린 남자애가 어떻게 벌써부터 동양인 여성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서슴없이 표현할 수 있었을까.
결국 누구한테 배웠느냐,라는 질문으로 수렴하게 되었다. 그 어린 새끼 주변의 누가 이런 혐오감을 심어줬단 말인가. 독일팀이 작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 리그에서 장렬하게 패해서 그런가? 그런데 말이다 아가야, 어차피 작년 너네 팀은 축구를 개*같이 했기 때문에(이건 독일 시민이 표현한 것이다) 그 분노를 내게 표출할 이유가 없단 말이다. 더 이상한 건 뭔지 아니? 내가 보기에는 너 역시 터키 이민자 후손으로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너 역시 이 사회에서 약자인 주제에 또 다른 약자에 대한 근본 없는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야.
고작 열한 살 혹은 열두 살 밖에 안 된 애새끼가. 도대체 너는 그런 걸 어디서 보고 배운 거니? 너희 아버지? 형?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면 지구 온난화 때문인가?
그리고 지난 토요일에 잠시 대화를 나눴던 프리드리히샤인의 어린 바텐더 총각이 생각났다.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말했다.
“난 이제 더 이상 런던이나 파리는 굳이 가지 않을 것 같아. 몇 년 전에 비하면 거기 분위기가 상당히 살벌해졌어. 특히 동양인 같은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을 별로 숨기지 않더라고.”
내 말을 들은 그 총각은 약간 코웃음을 치며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야 보고 있냐? 내가 하다못해 너네 나라 애새끼한테도 개무시를 당하고 있는데 그럴 일이 없다는 말이 어디서 나오니, 이 유머 감각도 없는 순진한 동백림 녀석아.
이런 생각으로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15초 만에 기분이 풀렸는데 바로 산책 중인 강아지 가족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 아들, 이런 식의 가족 관계는 아니었고. 나이 지긋하신 모녀 두 분이 강아지 세 마리를 산책시키는 중이었는데, 한 마리는 검은색 리트리버였고 다른 두 마리는 종을 알 수 없는 심각하게 귀여운 소형견들이었다. 치명적인 매력은 바로 세 마리 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애정을 갈구하는 타입이라는 점이었다. 너무너무너무 예뻐서 가장 느리게 걷는 강아지와 천천히 걸음을 맞춰 걸었더니 그 아이가 혀를 낼름낼름 거리며 내게 다가와 멈춰섰다. 어서 빨리 나를 예뻐해줘, 이케이케 만질만질해!! 라는 표정에 무릎을 꿇고 황홀한 표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만져드렸다. 그랬더니 그걸 본 다른 두 마리가 질 수 없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아니 걔말고 나도, 나도 예뻐해줘요 얼른! 그래서 세 마리 다 돌아가며 예뻐해줬다. 방금 전 인의예지를 모르는 오랑캐 녀석 때문에 때문에 상했던 기분이 다시 날아갈 듯 행복해졌다.
역시 세상에서 개님이 최고시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화요일이었다.
* Mattea - Breakfast & Lunch Café 그 독특한 이름의 요리는 바로 Shakhshuka. 이 집의 베스트메뉴는 치즈를 올린 와플과 샐러드다. 디저트로 먹을 수 있는 조각 케잌도 있으니 밥만 먹고 나가기 아쉬운 사람은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다.
* Schloss Charlottenburg 1713년, 프로이센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왕비 조피 샤를로테의 명으로 지어졌다. 이 시기 이후 독일 군주의 이름에는 프리드리히가 끊임없이 들어간다. 누가 누군지 헷갈리지만 가장 유명한 왕은 역시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렸던 프리드리히 2세. 2세라고 하면 1세의 아들 같지만 손자다. 속았지?
* SAIGON and more ... Das Original! 이 긴 이름이 다 식당 이름이 맞다. 아시아 음식에 환장한 독일인들이 바글바글하다. 가격대는 약간 높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