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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23. 2019

우주의 끝을 찾아서

베를린가서 펌프질하고 온 이야기

  ** 소글 클래스 수업 과제로 썼던 글입니다. 제목은 불면증 치료에 그렇게나 효과적이라는 NGC 다큐멘터리에서 따왔습니다. 저 역시 목성 이후의 기억이 없습니다. 


더크,라는 이름의 가이드는 투어 시작 시간 10분을 남겨 놓고 나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만나기로 한 역이 퍼레이드 때문에 폐쇄되었으니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일부러 투어 날짜를 바꾼 이유가 축제의 흥겨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오늘 퍼레이드 행사가 있는 줄 몰랐단다. 다른 것도 아니고 베를린 퀴어 문화에 대해 투어를 진행하겠다는 사람이 1년 중 가장 크고 시끄러운 게이 프라이드 있는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다니. 베를린에 처음 온 나도 알고 있는데.      


난리 통에 겨우 그를 만나서 투어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른 곳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3년 동안 살았다는 아파트였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 도착하니 가방에서 자신이 썼다는 책을 꺼내어 관련한 부분을 읽어준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도 다 알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소개글이었다. 아니 이 아저씨야, 내가 겨우 이런 걸 들으려고 45달러나 내고 토요일 오후에 여기 왔겠어요? 이미 그 작가 책도 읽어보고 왔다고요. 황당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치솟아 올랐지만 애써 진정했다. 어쩐지 투어 리뷰가 하나도 없더라니. 그럴듯한 소개글에 홀려 덜컥 결제부터 한 내 잘못이었다. 다음 장소에서는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 아직 실망하기는 이르다고 판단했다. 이 사람은 수십 년이나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다고 하니까, 책도 낸 작가라고 하니까 믿음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나보다야 낫겠지.      


그런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주택가의 한 골목이었다.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차가 들어올 수 없다는 이 골목에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수도 펌프가 있다고 했다. 과연 영화에서나 볼법한 펌프가 떡하니 골목 한 가운데 있긴 있었다. 

문제의 그 펌프. 

그가 나보고 물을 한 번 끌어올려보라고 했다. 지금도 사용할 수 있다며. 펌프질을 하고 있자니 태양계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베를린에서 펌프질하려고 내 피 같은 돈을 냈단 말인가. 이 아저씨는 20년대 문화 체험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했던 거지. 여기는 화성인가 베를린인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다음에는 1920년대 스타일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펍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더크가 혹시 스마트폰 데이터가 되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펍의 정확한 주소를 찾아줄 수 있냐고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구글맵에 영어로 된 펍의 이름을 찍어 확인을 위해 그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이 주소와 이름이 맞나요?      


“아 나는 중국어 몰라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야 이 멍청한 아저씨야, 내가 아까 한국에서 왔다고 했냐 안했냐. 그것도 북한아니고 남한이라고 2번이나 말했잖아. 그리고 이거 영어잖아, 눈이 없냐. 이 망할 놈의 서독 아재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명석한, 준비성이 철저한, 빈틈없는... 독일인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형편없는, 어리석은, 무식한 등등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가 책에서 배운 독일인은 이렇지 않았는데. 이 인간 이거 트럼프랑 트위터 친구 아니야?    

  

3초 정도 온갖 저주를 퍼붓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여기는 아직 목성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태양계 여행은 끝난다. 정말 즐거운 표정을 유지하며 유서 깊은 펍으로 향했다. 그동안 직장을 다니며 연마한 기술을 여기서 쓸 줄이야. 불같은 내 속을 알 길 없는 더크는 펍으로 들어가 내부 장식을 보여준다. 그게 끝이었다. 하나 더 있긴 했다. 60년대에 베를린을 방문한 존.F.케네디를 이 펍에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서 못 간다는 답장이 왔다더라. 이게 진짜 끝이었다. 천왕성 쯤 온 것 같았다. 더 이상 갈 수 는 없었다. 의도치 않게 음료도 주문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었다. 다른 트립에서는 일정 중 어디어디에 들러 담소를 나눌 예정이니 원한다면 현금을 지참하라고 미리 언질을 줬다. 이 인간이 진짜...!! 홧김에 독한 술을 마셨다. 속이 쓰렸지만 맨정신으로는 이 여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고 있다는 펍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이 아재와 명왕성까지 같이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매우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하고 싶다고 인사를 나누고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친구와의 저녁식사 장소로 향하며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든 내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쥐뿔도 모르는 인간에게 돈을 주고 맡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짜증난 마음을 달래는 사이 열차는 프리드리히샤인, 시끌벅적한 나의 지구에 도착했다. 베를린의 여름, 토요일 오후의 태양계 탐험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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