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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16. 2019

베를린에서 그리다.

7월 22일 

아침에 늘 그렇듯 괴로워하며 일어나 근처 베트남 식당*에서 팟씨유 비슷한 걸 먹었다. 그 식당 이름은 볼 때마다 헷갈린다만 뭐 딱히 문제는 되지 않는다. 여사장님이 마치 영화 <쿵푸허슬>에 나올 것 같은 굉장한 포스를 가지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믿음이 갔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들어가서 4인용 테이블에 앉았는데, 오분도 되지 않아 아시아 음식에 환장한 수많은 독일 남자들이(왠지 모르겠지만 주로 남자들이 많았다) 중공군 들어오듯 마구 밀려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가 자리에 혼자 앉을 걸. 최애 누들인 팟 씨유가 있어서 주저 없이 주문하고 미친 듯한 젓가락 놀림으로 순식간에 식사를 마쳤다. 너무 허겁지겁 먹어서 체할까 잠시 걱정했지만 나의 소화력은 대단했다. 눈 뜨자마자 맥주를 마실 수는 없어서(사실 약간 흔들리긴 했다만) 망고 라씨를 주문했는데 정말이지 행복한 맛이었다.          


오늘은 월요일. 베를린의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문을 닫는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월요일에 문을 여는 곳을 미리 검색해왔다. 그곳은 바로 독일 역사박물관. 로마 제국 이후부터 2차 대전에서 패할 때까지의 길고 긴 독일의 역사가 수많은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지난주부터 매일 미친 듯이 걸었기 때문에 중세 및 19세기까지는 아주 빠르게 스킵하고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20세기 초 역사관을 매의 눈으로 관람했다. 수많은 전시품 중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작품은 바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조각상*이었다. 차마 사진도 찍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1차대전 후의 비참한 독일인들은 현실을 담은 작품이 많다.


비슷한 감정을 담은 다른 조각품 


나치당의 전당대회.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인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세계대공황에 겹쳐 독일인들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실업,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때, 즉 너무 굶주리고 괴롭고 불행한 틈을 타서 나치당과 히틀러가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백장미단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 독일인들이 취했던 행동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나치의 광기에 대항하여 뮌헨의 대학생들과 교수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던 비폭력 저항 그룹인 백장미단*의 사건을 보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올바른 행동을 해보려는 고결한 인간성을 배울 수 있다. 당연히 그들의 사진과 당시의 정황을 담은 문서들도 전시되어 있다. 구글 리뷰의 누군가는 독일이 나치를 팔아 장사를 한다고 비아냥댔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자세히 한 나라의 가장 큰 치부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저녁이 되어 에어비앤비에서 신청한 드로잉 클래스를 들으러 갔다. 오늘의 드로잉 장소는 크로이츠베르그의 오버바움 브릿지 근처 카페. 나와 또 다른 학생은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은 지금 독일의 한 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그래서 아주 간단한 대화는 독일어로 할 수 있을 정도의 똘똘이였다. 그림은 주로 혼자 풍경 수채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번 수업에서 소실점에 대해 알고 싶다며 질문을 했다. 야 그거 한 번 배운다고 되는 거 아닌데, 몇 년 배운 나도 어려워서 맨날 형태 틀리고 있어. 그러나 영어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참았다(?). 


이면지에 이런 저런 풍경을 그리며 대강 손을 풀고 브라운 색의 파스텔로 오버바움 브릿지를 스케치하고 있었더니 선생님이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린 건 처음이라, 다른 곳도 아닌 늘 꿈꾸던 도시 베를린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긴 기다림 끝에 이곳에 와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앞으로 또 이런 날이 올까. 

     


저녁으로 베를린 부리또 컴퍼니*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부리또 보울을 흡입했다. 맛이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카운터 직원이 너무 친절해서 조만간 또 가지 않을까 싶다. 무표정하니 어쩌니 해도 베를린은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드로잉 클래스 선생님과 데이빗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이 도시의 인상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늘 무뚝뚝하고 건조하고 시니컬한 나와는 달리 이곳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하니까 둘 다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와서 그런지 여기 사람들 진짜 불친절하고 성격도 나쁘던데... 아마 안나 너가 동양인 여자인데다 독일어를 아예 못하는 외국인 관광객이라 오히려 더 잘해준 걸 수도 있어.”    

 

“맞아, 나는 함부르크 근처 도시에서 살다가 수십 년 전에 여기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못되서 처음에 되게 힘들었어. 베를린 사람들은 다른 독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조금.... 싸가지 없달까? 그런 느낌이야. 예전에 바에 갔는데 글쎄 주문하는데 15분이나 걸렸어. 직원이 나를 완전 무시하더라고!”  

  

“아니, 선생님은 대체 어디 있었던 겁니까. 게이바 아니었어요??”     



아마 내가 현금 부자인 중국 여자로 보여서 그렇게나 잘 대해 준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베를린에서 맞는 두 번 째 월요일이었다. 



*Gia Bao Quan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식당은 점심때마다 늘 손님들로 붐볐다. 베를린에서 가장 자주 갔던 식당이다. 너무 맛있어서 메뉴까지 입수하여 구글 번역으로 무슨 재료로 어떻게 요리한 건지 해석까지 했다. 이 식당 때문에라도 베를린에 다시 가고 싶을 정도다. 


*Käthe Kollwitz 케테 콜비츠. 그녀의 작품을 단 한번 보더라도 그 강렬하고 처절한 심정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나의 그림 선생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다. 어떤 작품에서든 그 감정이 꼭 드러나야 한다고. 그 조건에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될 정도다. 


*Die Weiße Rose 나치 독일에 저항한 비폭력 단체. 뮌헨의 대학생이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가 결성했다. 나치의 학살에 비판하는 전단을 뿌렸다가 체포되었고 이들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까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1943년 2월 사형 당시 한스는 겨우 스물 다섯, 조피는 스물 두 살이었다.           


*Berlin Burrito Company 부리또 보울을 주문하면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를 다 선택할 수 있다. 멕시코 음식에 또 환장하는 내게 이 식당 역시 자주 방문한 곳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식사 시간에는 늘 사람들이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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