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3
냐짱 여행의 마지막 밤 저녁은 러시아인이 운영한다는 수제 버거집으로 정했다. 여러 도시를 함께 여행했던 리타언니와 나, 둘 다 베트남까지 와서 왜 굳이 수제 버거를 먹어야 하냐고 투덜댈 성격들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지나치게 예민한 내가 단 한 가지 무던한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음식이다. 사실 난 쌀국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먹자고 하면 군소리 없이 먹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떠나는 날까지도 굳이 먹어보려고 하지 않았는데, 전혀 아쉽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쌀국수는 먹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잔소리도 듣지 않았고.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사람이 없었다.
지난 해 봄에 엄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는 내 주변의 보통의 엄마들이 그렇듯이 집에서든 여행지에서든 당신의 아들, 딸에게 모든 분야에 걸쳐 잔소리를 하셨고 나는 대체로 수긍하다가 종종 짜증내다가, 가끔은 싸우다가, 그리고 은근슬쩍 화해를 하곤 했다. 순하고 듬직한 오빠는 엄마의 말에 토를 달거나, 거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까탈스러운 성정의 나만이 엄마에게 사사건건 대적할 뿐. 그래도 엄마는 내가 내민 화해의 제스처를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다시 무한 반복이었다. 엄마가 대수술을 받으신 후에는 딱 한 번 크게 싸웠다. 어떤 정신나간 자식이 말기 암환자인 어머니에게 쉽게 짜증을 낼 수 있겠는가.
엄마는 꽃잎이 내리는 지난 봄의 어느 날, 오빠와 나의 손을 잡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올해 3월, 나는 해변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베트남의 휴양도시 냐짱으로 떠났다. 나의 좋은 여행 친구 리타언니와 함께.
다시 여권을 꺼내 본 건 3년 만이었다. 엄마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기 전 겨울, 오사카 여행을 다녀왔고 그 때 이후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료 일자가 다가와서 다시 여권 사진을 찍고, 새로운 여권을 발급받았다. 지난 10년 간의 여행 기록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 여행 중 절반은 엄마와 함께 했는데. 새로운 여권에 새로운 도장이 찍힌다고 생각하니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아니다, 사실은 그저 그랬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알아보는 게 딱히 귀찮거나 지루하지는 않는 정도였다. 떠나는 날까지도 생각만큼 신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여행을 가든 공항으로 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공항철도를 타면 의무적으로 꼭 들어야하는 노래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이번 여행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저 지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아주 많이 아팠다. 회복하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이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러니 다시 바다 건너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보다 5시간 동안 비행기는 탈 수 있을까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고 계시는 선생님께서는 여행을 말리지 않으셨지만, 내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는지, 또 같이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물어보셨다.
“왜 안나씨가 여행 준비를 주로 하시죠?”
“제가 지금 백수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예약하는 거나, 검색해서 일정 짜는 건 제가 좋아하고, 그 언니는 길을 진짜 잘 찾아요. 저는 방향감각이 없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사실 여행 준비하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아요. 거기 가서 뭐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난 뭐가 힘들었을까.
베트남의 더위에 지치고 않고 여행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이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여행 날짜가 다가오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내가 더위 먹고 여행 중에 퍼져서 아무것도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따뜻한 바람과 새파란 바다가 있는 곳으로 왔다. 다행히 더위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는 없었다. 딱 한번, 빈펄 랜드 워터 파크에서 신나고 놀고 나니 체력이 방전되어 오후 내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 웃고 떠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런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이렇게나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엄마도 이 풍경을 보셨다면 정말로 행복해 하셨을텐데. 그렇게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 호스피스 병동 침대를 떠나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저녁, 두툼한 수제 버거와 근사한 맛의 맥주를 앞에 두고 나는 어떤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영화는 <코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한 친구가 너는 당분간 <코코>를 보지 말라고 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영화는 보지 않은 편이 좋다며.
“그 영화, 너 친구가 보지 말라고 했던 거 아니야?”
“네. 근데 너무 보고 싶어서 얼마 전에 봤어요. 누가 리뷰에 이렇게 써놨더라구요.
아가야, 너는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겠지.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아늑한 식당에 동양인 손님들은 우리 밖에 없었다. 옆 테이블의 러시아 사람들은 버거와 사이공 맥주를 앞에 두고 훌쩍거리는 우리들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살면서 이런 저런 장소에서 울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 중에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미국식 수제 버거집은 없었다. 그 때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 밖에 없다는 것이 묘하게 위안을 주었다. 여행지의 밤이란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떠나기 전에는 머리 속에서만 맴돌고 있던 생각들이, 차마 내보이지 못한 감정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 지 계속 고민했어요. 태어났으니까, 카드값 갚아야 하니까 살아야 하는걸까.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사실 이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리타언니의 커다란 눈이 훨씬 더 커졌다. 키도 크고 눈도 크고 마음도 큰 언니. 언니는 맥주를 조금 더 들이켰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 사람인데. 야야 너 임마 그런 소리 하지마. 아니 잠깐만 내 이야기를 더 들어봐요. 걱정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마음을 정했어요. 이렇게 가끔 어디든 갈 수 있으면 될 거 같아요.”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다. 돈이 없으면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타지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최소한의 경비.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어디서든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힘을 길러야 했다. 그러려면 나는 살아야 했다. 대충 살아도 안되고 열심히. 사건 사고가 많은 나라의 시민이니까 적당한 운도 따라야 하겠고. 그러니 매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동안 기껏 배운 영어도 까먹지 말아야 하고, 글씨로 가득한 가이드북을 읽을 때 필요한 집중력도 더 키워야 했다. 몸 여기 저기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책 읽기가 힘들어졌고, 여행 카페의 글조차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적절한 수준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건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뜻도 되었고, 의외로 내 삶의 질이 딱히 나쁘지 않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맑아졌다. 남들에게는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이제 어떻게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듯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사이드 메뉴로 나온 감자 튀김을 먹었다. 그러고보니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느낀 것도, 맛있는 게 사라지는 게 아까워서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먹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우리 둘 다 너무 맛있어, 배가 터질 거 같아 근데 더 먹고 싶다, 커피는 어디로 마시러 갈까, 하며 끊임없이 말하고 쉴 새 없이 웃었다. 작은 식당은 러시아인들로 가득 찼다가 다시 비워졌다가 잠시 후 또다시 채워졌다. 이 곳은 냐짱을 여행하는 혹은 오래 머물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익숙한 언어를 듣고 싶지만, 너무 익숙한 음식은 먹고 싶지 않을 때 들르는 곳 같았다.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식당을 찾을 수 있으려나. 언젠가 이 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언니와 나의 냐짱 여행은 별일 없이 끝났다. 관광객이라고 바가지를 쓰는 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일도, 각종 예약에 문제가 생겨 일정이 틀어지는 일도, 시장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이 무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