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Day 1
일요일 오전 7시, 인천 공항 출국장 탑승 게이트 앞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쓰다.
5시 50분에 예약한 콜택시는 35분에 도착했다. 기사님이 새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예약 확인 전화를 걸어서 반성했다. 세상에서 나만 게으른가 보다. 안락한 뒷좌석에 앉아 졸다가 깼다가 비몽사몽 인천 공항에 도착했더니 출국장에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혼이 나갔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잠시 고찰을 해봤는데 단오절인가 뭔가 하는 중국인들의 연휴였던 거 같다. 분명 한국은 연휴가 끝난 마당인데, 일요일 오전에 이렇게나 나라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니.
나는 오늘 대략 4년 전 추석, 대만에서 내게 서바이벌 체험을 선사해준 캐세이 퍼시픽 항공기를 타고 홍콩을 경유하여 방콕으로 간다. 어제 짐을 다 싸고 심심해서 미리 온라인 체크인을 했는데 이게 나도 모르게 잘한 짓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캐세이 퍼시픽 항공은 승객들이 의무적으로 셀프 체크인을 하도록 유도한다. 나는 셀프 체크인을 하면서 미리 자리까지 지정해놓았기 때문에 28인치 캐리어만 보내면 되었다. 카운터에서는 보딩 패스도 인쇄해주지 않았다. 내 아이폰 월렛에 저장한 보딩 패스 바코드로 출국 심사와 보안 검색대까지 다 통과했다. 먼 옛날 2004년 여름, 처음 인천 공항에 왔을 때는 정말 출국장에 사람이 몇 명 없었는데 어느새 이렇게까지 진화했다. 내가 마치 22세기 힙스터 같아서 약간 으쓱하긴 한데, 정작 온라인 보딩 패스에는 탑승 게이트가 나오지 않아서 수화물 영수증에 써진 걸 계속 보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엄청 헷갈렸다. 다들 이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폰에 보딩 패스를 저장해서 직접 스캔하는 승객은 오직 나 밖에 없었다.
이제 홍콩행 탑승까지 한 시간 남았다.
내가 타는 게이트는 그나마 한산한 편이지만 바로 옆에 무려 뽀로로 랜드 같은 게 있어서 미취학 아동들이 떠드는 소리로 정신이 없다. 아무리 애들이 기운차다 하지만 어떻게 아침 7시 반부터 뛰어놀 수 있을까. 자리가 한가하다 보니 면세점 직원들도 은근슬쩍 와서 쉰다.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다들 어리다. 세상에 나만 게으른 것 같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시고 있다. 이 공항 스타벅스 지점도 나름대로 내겐 의미가 있는 곳인데, 엄마와 해외 여행을 다니던 때에 항상 여기서 커피를 사서 엄마랑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습습한 속도로 보안 검색을 하고 출국 심사를 마치면, 그날 힘든 과정은 일단락되는 셈이라 면세점 구경하기 전에 에너지도 보충할 겸 함께 커피를 마셨다. 평소에는 비싸서 마시지도 않는 스타벅스 커피를 엄마는 너무 맛있게 드셨다. 장성한 딸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가면서 비싼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면세점을 구경하는 그 행위가 엄마에겐 더없는 기쁨이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 중산층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일종의 위안의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정말 이 새벽에 사람이 너무 너무 너무 많아서 결제하는 직원에게 잠시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스스로 약속한 것이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아니 원래 평소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요?”
“그럼요. 늘 이 정도에요.”
“아이구 수고하십니다...”
이 새벽부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웃으면서 상대해야 하는 젊은 그들에게 경탄했다. 세상에 나만 게으르구나. 그리고 몇 년 만에 알게 되었는데, 이제 사전 등록 없이도 자동 출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다. 10년 전 여권을 발급받고 언젠가의 출국 날 부지런히 자동 출입국 심사 신청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은 또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그 와중에 배고프다. 이따 홍콩 공항에서 딤섬 먹어야지.
오후 12시 15분, 홍콩 공항 방콕행 비행기 게이트 앞에 앉아서 쓴다.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홍콩 공항에 잠시 들러서 딤섬을 먹고 가겠다며 호언장담했으나, 배가 너무 빵빵하여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홍콩 공항은 전세계 힙스터들이 모두 모여 있다. 심지어 식당 이름도 범상치 않다.
비프 앤 리버티(Beef & Liberty)
소고기가 아니면 자유를! 이라는 의미로 지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실제로 확인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2층 식당가까지 올라갈 인간이 아니다.
인천에서 홍콩까지는 쾌적하게 왔다. 일요일 오전 비행기라 그런지 서울 유람을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가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갑자기 다들 자는 분위기였다. 나는 어제 고심 끝에 2-4-2 좌석 중에 중간의 통로 좌석을 선점했는데 결과적으로 매우 머리를 잘 쓴 거였다. 다들 자느라 정신이 없어 굉장히 고요했고 내 자리는 앞 쪽이라 기내식도 일찍 나왔다. 그렇다, 홍콩으로 가는 캐세이 퍼시픽 노선은 기내식이 나온다. 한동안 저가 항공에 거리가 짧은 노선만 타고 다니다가 드디어 기내식 나오는 노선을 탔더니 뿌듯하기는커녕 배가 더부룩.
출발 전에 인터넷 면세로 액체류 화장품을 조금 샀는데, 홍콩에서 경유할 때 꽤나 엄격하게 다시 검사했다. 보안 검색을 하면서 면세품에서 포장해준 상품을 다 뜯은 다음에 엑스 레이를 찍고 홍콩 공항용 비닐로 다시 포장해줬다. 인천에서 면세품을 인도받을 때 비닐 겉면에 ‘중간에 이 포장이 손상되어 있다면 압수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어서 아니 누구 맘대로 압수를 하고 말고야!하고 호기롭게 속으로만 생각했다. 허나 막상 보안 검색하는 아주머니께서 단호하게 내 걸 다 뜯어 검사할 때는 순한 양이 되어 다소곳한 자세로 기다렸다. 압수해가도 어쩔 수 없지 뭐. 다 이유가 있으려니... 역시 나는 공권력에 약한 너무나도 처리하기 쉬운 인간이었도다.
심심해서 잠시 걸었다. 홍콩을 경유지로 하는 항공기 노선이 매우 많다.
아까 내 옆쪽에 앉았던 서양인 총각은 파리로 가는 듯 했다. 서양 사람답지 않게 비행기가 다 주차하기도 전에 일어나서 앞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더군. 한국 패치가 확실하게 되었다. 다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에 혼자 열심히 책을 읽고 있길래 은근슬쩍 염탐해보니 프랑스어로 된 책이었다. 중간에 혼자 큭큭 웃는 걸로 보아 재밌는 에세이 같았다. 왜냐면 책 제목이 라 꼬레 어쩌고 이런 거라서. 내 추측에는 ‘한국에서 살아남는 20가지 방법’ 뭐 이런 종류의 에세이가 아닐까 싶다. 모니터에 파리 경유 관련 정보가 뜨는 걸로 보아 그 양반은 프랑스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 총각이 너무 열심히 책을 읽길래 나도 질 수 없어서(?) 이고 지고 싸들고 온 책 중에 하루키가 그리스와 터키 여행 후 쓴 책인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를 꺼내들었다. 알고보니 1989년에 여행하고 쓴 거였다... 어쩐지 표지가 요즘 느낌이 아니다 했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하루키는 열심히 비를 맞으며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한꺼번에 읽기 아까워서 그리스 아토스 섬의 수도원 두 군데를 들른 데 까지만 읽고 덮었다. 절대로 졸려서 그만 읽은 것은 아니다.
여행 전날 새벽 3시 쯤 잠들어서 5시 전에 일어났더니 기내식 조금 먹고 나자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아마 입도 벌리고 잤을 거다. 아이 쪽팔려. 더 쪽팔린 건 캐세이 퍼시픽의 승무원이 나한테 갑자기 중국어로 식사 메뉴는 뭘로 할건지 물어봤다는거다. 젠장. 그래 내가 대륙을 호령하게 생겼지. 앙심은 품지 않겠다. 앞으로 보딩까지는 15분이 남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잘 간다.
아까 홍콩에 착륙할 때 매우 방정맞게 내려와서 잠시 식겁했다. 기장님이 처음에 인사할 때 조금 방정맞아서 약간 불안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온몸으로 기류를 느끼며 착륙했다. 간만에 느끼는 스펙타클함이었다. 방콕행 비행기는 얌전하게 갔으면 좋겠고만.
밤 10시, 미친듯이 맥주를 마시고 쓴다.
술이 고팠던 마음보다는 너무 더워서 어쩔 줄 모르고 마신 감이 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방콕 호텔에 도착했다. 이제 저 무거운 캐리어는 내가 옮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대만에서 어떨지는 모르겠네.
처음으로 접한 방콕은 이국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동안 꽤 많은 외국 도시로 유람을 다녀왔지만 온전히 한국인이 정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는데. 흔치 않은 상황이다. 태국 여행 카페에서 다들 너무 유흥가라 만류하는 지역에 호텔을 잡았더니 한국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지금 묵고 있는 ‘트래블로지(Travelodge)’는 런던에서도 이용한 저렴하고 깔끔한 3성급 체인 호텔이다. 특히 스쿰빗 11 지점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가구와 시설이 다 새 것이다. 그거 하나 보고 결제했다. 내일은 루프탑 수영장과 바도 이용해보련다.
호텔에 짐을 풀고 샤워를 했더니 배가 너무 고파 어지러움을 느끼며 근처 수제 버거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방향치에 걸맞게 당연히 잠시 길을 못 찾았지만 곧 ‘파이어 하우스’를 찾아 들어갔다. 시그니처 버거와 웻지 감자를 먹었는데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직원이 추천해준 싱하 맥주도 심각하게 맛있었고. 왜 그 시간에 그 식당에 나 혼자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배도 차고 하여 무서울 게 없어져서 그 주변을 돌아보고 터미널 21 쇼핑몰까지 걸어갔다. 내 취향에 딱 맞는 무시무시한 티셔츠 가게가 많았다. 이제 옷은 그만 사야지 하고 다짐한 순간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난 런던 플로어의 그들. 너무 예뻤다. 옷에서 쉰내가 나면 어쩔 수 없이 사야지, 다짐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데 아까는 보지 못했던 커플들이 너무 많이 보였다.
젊거나 혹은 나이가 든 다채로운 인종의 외국인 남성들과 이제 갓 20살이 될까 말까한 태국 여자애들.
아직 성인이 안 된 어린 남자애를 옆에 끼고 다니는 게 아닌 게 어딘가 싶고, 굳이 저렇게까지 살아야 싶기도 하고. 저 남자들이 주는 돈으로 어떻게든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방콕 환락가에서 어떻게 놀아야 잘 노는 건지 전수해주는 블로그보다는 그래도 여자들이랑 데이트라도 하는 쟤네들이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생각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문제는 너무 더웠다는 거다.
해도 떨어진 상황이었으나 조금 걷다 보니 숨이 차다 못해 어지러웠다. 오늘 잠을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체력이 진짜 저질인건가. 아니 그럼 그동안 비싼 돈 들여 운동한 건 다 뭔가. 밤에도 이렇게 더운데 왕궁이니 사원이니 도대체 어떻게 돌아다녀야 하는 건가. 그냥 호텔에만 있다가 밤에만 나가야 하는건가. 이럴거면 난 여기 왜 왔는가. 굳이 이 이역만리 타국까지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저 외국놈들은 어린 놈이든 늙은 놈이든 연애라도 하는데. 다시 이런 무한 루프의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내일은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커피 클럽인지 뭔지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수영장도 가겠노라. 저녁에는 딤섬도 팟타이도 먹겠노라. 마사지도 받겠노라. 더워도 지지 않겠다. 아 근데 더워도 너무 더워.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