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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4. 2019

저스틴 비버로는 부족하다

6/10 Day 2. 오후 10시 

정신없어 자다가 쌩뚱맞게 복도에서 들려오는 장엄한 기도 소리에 잠을 깼다. 영어였다. 이 환락의 도시에 단체로 선교를 온 건지 아니면 여름을 맞아 캠프를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하루를 여는 상황치고는 특이해서 나쁘지 않았다. 무슬림들의 거리가 근처에 있어서 알라에게 바치는 기도를 듣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텐데, 기독교인들이 하는 기도를 방콕 호텔 복도에서 들을 줄이야. 아멘.      


피로가 풀리지 않아 정오까지 입을 벌리고 <쥬라기 월드>를 보다가 겨우 침대에서 벗어나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왔다. 바로 옆 테이블의 서양놈들 다리를 계속 떨어서 정신이 없다. 어제 비행기 옆자리 총각도 그러더만. 얘들은 밥상에서 다리 떨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는 부모님이 없었나 보다.      


오늘 첫 끼니를 해결하러 들어온 이 식당은 ‘커피 클럽’이라는 프랜차이즈 비스트로다. 어쩐지 아가씨가 되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바로 옆의 호텔인 ‘홀리데이 인’ 1층에 있는 이 식당에서 20000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밥을 먹었다. 듣도 보도 못한 브런치 메뉴를 주문하면서 혼자 들떴다. 생각보다 카페의 규모가 작아서 이 더위에 야외 테이블에 서양인 남자들 네 명이 옹기종기 앉아서 밥을 먹는 광경도 봤다. 으 더워. 방콕에는 서양 남자들이 정말 많다. 외국인들에게 특화된 지역의 비싼 카페답게 서비스 직원들의 전문성도 높았는데, 아까 옆의 손님에게 갈 음식이 나한테 왔다. 나는 내가 시킨 게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하여 일단 가만히 있었더니 직원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다시 내왔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두 번이나 사과를 했다.      


비싼 돈을 주고 먹은 음식은 수란 두 개와 삶은 콩과 익숙하지만 생소한 삶은 채소가 밑에 깔리고(그 정체가 뭔지 모르겠다) 그 위에 퀴노아가 가득 올라간 음식이었다. 맛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음식은 또 처음 먹어봤다. 스스로의 선택에 감탄하면서 입가에 소스가 묻지 않도록 조신한 척하며 다 먹었다.

이것을 먹기 위해서 나는 방콕에 온 것이다 

커피 클럽의 대단한 메뉴는 그들의 시그니처 아이스 음료 메뉴인데, 내가 먹은 건 그 중 가장 무난한 아이스 라떼였다. 그러나 맛은 전혀 무난하지 않았다. 세상에 라떼 안에 아이스크림이 하나 들어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매그넘이었다. 이걸 먹기 위해 나는 방콕에 온 것이다!라는 환희에 가득 차서 쪽쪽 소리를 내며 빨대로 팍팍 빨아먹었다. 더위로 빠져나간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카페인과 당분이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      


오후 10시, 바오밥이라는 펍에 앉아서 모기에게 물려가며 쓴다.      


저스틴 비버 노래가 나온다. 선곡이 이래서는 이 거리의 주된 호구들인 서양 남자를 잡을 수가 없다.

      

생각보다 엄청 비싼 점심을 먹고 잠시 멍때리다가 드디어 호텔 루프 탑에 있는 수영장에서 노닥거려 봤다. 날씨가 흐리다가 볕이 들다가 오락가락 해서 온 다리에 선크림을 발랐다. 지난 봄 베트남 냐짱 리조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다리가 다 타버려서 귀국하는 날 고생했다. 그래서 그때 처방받은 화상 연고도 챙겼다. 내 캐리어 보다가 피난민 짐인 줄 알았다.      


오후의 수영장에는 서양인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는 러시아 혹은 동구권이라고 불리던 나라의 사람들이 쓸 법한 언어로 대화를 했다. 궁금했지만 아무에게도 당신은 대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내 나름의 다짐을 하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취하지는 않았고 어디서 왔든 아무려면 어때,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등에 빽빽하게 온갖 글로 문신을 한 서양 남자에게 도대체 니 등짝에 그건 뭐냐, 반야심경이라도 문신한거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30도가 넘는 오후에 풀장에 앉아 하루키가 1988년에 썼다는 그리스 터키 여행 에세이 책을 마저 읽었다. 어쩐지 겉표지가 조금 올드하다 싶었는데 30년 전에 쓴 에세이였다. 물론 한국에서 출판된 책의 디자인은 21세기에 하긴 했다만. 하루키가 아직 소설가로 엄청난 명성을 얻기 전에 쓴 글이지만, 조금만 읽어봐도 하루키의 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의 아토스 섬에서 살고 있는 고양이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다.   

   

고양이는 모르는 것이다. 산을 여러 개 넘으면 그곳에는 고양이 사료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가다랑어 맛과 쇠고기 맛과 닭고기 맛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구루메(미식가) 스페셜 통조림이라는 것까지 있다는 사실을. 고양이들 중에는 운동 부족, 영양 과다로 빨리 죽는 고양이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곰팡이 빵 따위는 절대로 고양이가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것들은 캅소카리비아의 고양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고양이는 분명 ‘아- 맛있다. 오늘도 곰팡이 빵을 먹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 살아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라고 생각하면서 곰팡이 빵을 먹고 있는 것일 게다.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 by 무라카미 하루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그 책. 1+1 시간이라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두 잔 받았다


책을 읽다가 너무 크게 웃을 수 없어 입술을 깨물어가며 몰래 웃었다. 하루키는 역시 여행 에세이에서 매력이 넘친다. 수영장에서 한참 나른하게 놀다가 정신을 차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태국에 도착한지 만 하루가 지났으나 나는 팟 타이 비슷한 음식은 시도도 안하고 있다. 태국 음식이 딱히 싫은 건 아니고,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추천하는 소위 가성비가 쩌는 타이 레스토랑들은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하고 걸어가기에는 지치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호텔 바로 옆에 하나 있긴 한데 모두들 평이 별로라. 그리고 여기는 비싼 동네라서 합정동 수준으로 음식점과 카페 물가가 비싸다. 

     

그리하여 쌀밥이 먹고 싶은 나는 생연어 덮밥이 있는 일식당을 찾아갔다. 구글맵을 켜고 또이또이한 눈으로 돌아다니다가 바로 옆에 있는 푸드 코트 비슷한 건물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어제부터 계속 지나다니다가 본 곳인데, 약간 무서운 서양인 삐끼가(정말 삐끼라는 표현 밖에는 딱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 호객을 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다녔던 곳이었다. 저기다, 오늘 내가 누울 자리가.      


배고픈 얼굴을 하고 들어가서 덮밥이 대체 어딨는지 3일 굶은 암사자의 눈빛으로 메뉴판을 스캔했다. 연어덮밥과 혼마구로 스시 2개와 약간의 죄책감으로 우롱차를 주문했다. <고독한 미식가>에서 고로 상이 맨날 마시는 거라 일식당에 가면 종종 마신다. 생연어와 적절히 간을 한 쌀밥 한 숟갈을 함께 먹으니 며칠 동안 느꼈던 탄수화물에 대한 갈증이 사라졌다. 쌀밥 최고.      


배가 부르니 용기가 생겼다. 호텔 근처의 마사지 샵에 찾아갈 용기. 나 같은 심각한 방향치는 지도는 볼 줄 알지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지금 이 길 위에서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지도를 봐도 딱히 소용이 없는 거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이쪽이 어느 방향이지? 동서남북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거지? 난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나는 여길 왜 왔지? 나는 누구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자면 식은땀이 나면서 금은보화도 포기할 지경이 된다. 


어릴 때 보물찾기를 잘 했다면 아니, 보물찾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면 이런 방향치로 자라지 않았을까. 다행히 구글맵은 내가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화살표로 정확히 알려주긴 했다. 문제는 내가 있는 정확한 장소를 잘 못 잡는다는 건데 배가 부르니 용기백배해져서 그럴 듯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놀랍게도 나는 헤매지 않고 목적지인 마시지 샵에 도착했다. 마사지 샵의 이름은 약간 당황스러운데 매직 핸즈인지, 매지컬 핸즈인지 그렇다. 자꾸 헷갈린다. 일단 마사지를 받아보고 계속 올지 말지 결정하자는 마음에 가장 기본적인 풋 마사지 서비스를 받았는데 한 시간이 우습게 사라졌다. 나는 온몸이 노곤노곤해졌다. 특히 마지막에 팔꿈치를 이용해서 어깨와 견갑골을 팍팍 눌러주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여기다, 오늘 내가 두 번째로 누울 자리가.      


얼굴과 어깨도 더 받고 싶었지만 한 번에 모든 것을 경험하면 시시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내일 다른 서비스로 받기로 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잠깐 쓸데없는 아이폰질을 하고 있다가(근미래에 아마도 ‘폰질하다’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패드를 챙겨서 근처의 바오밥 카페로 온 것이 지금 오후 10시 25분.      


바깥의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 바깥에 롱테이블로 만들어진 흡연석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려고 한다. 나 같아도 누가 펍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안 들어갈 거 같다. 이곳은 환락의 거리이고 나처럼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자는 장사에 방해가 될 뿐이다. 오늘 일기를 얼른 해치우고 칵테일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야 하지 싶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직원의 호객하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미안해요 아저씨. 이것만 다 마시고 갈게요. 너무 더워서 그런가, 술을 마셔도 별로 취하지도 않는다. 핑계 같지만 사실이다. 다음 달에 진료 받으러 가서 겁나 술 퍼 마시고 왔어요, 라고 고백하는 수줍은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모기에 물린 다리를 긁으며 바로 건너편의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팬시한 표현으로는 브루어리나 뭐 그렇겠지만 호프집이라고 해야 그 정서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의 이름은 ‘Daniel Thaiger’. 맥주를 자신있게 내세우는 집이라 그런지 독일인들이 가득하다.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내가 살면서 관찰하거나 접해본 독일 사람들은 대체로 젠틀하고 아주 명석하다. 그런 인텔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포르노를 찍는다니 무슨 조화인가. 하긴 그런 쪽으로는 일본인들도 질 수 없지.      


이렇게 자질구레하게 모든 것을 기록하는 이유는 바로 하루키의 한 문장 때문이다. '여행 중에 카페에 들어오면 일기를 쓴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의 말에 또 반성했다. 하루키 같은 대작가도 이렇게 부지런하게 글을 쓰는데 역시 나는 쓰레기다. 음식물 쓰레기. 자기반성과 혐오에 빠져 아이패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앞에 세 명의 독일인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아주 열정적이고 흥에 겨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대화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의 대화 주제가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나의 짐작은,      


1. 스무 살 즈음에 겪었던 가장 끔찍한 행오버 

2. 현재 독일이 처해 있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

3. 방콕에서 실망한 레이디 보이쇼. 근처 어딘가에 더 화끈한 쇼가 있다는 정보 교환 

4.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이 과연 다음 월드컵에서는 뻘짓을 안할 것인가 

5. 방콕 여행에 대한 소회.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 보기들 중에 답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열정적인 독일인들이라니 뭔가 맥락이 맞지 않는 느낌이지만 아디다스 러닝화에 목이 긴 양말까지 신고 열심히 대화하는 남자들은 분명 독일에서 왔음이 틀림없다. 누가 그러는데 샌들에 양말 신고 있으면 백 프로 독일 남자랬다. 그리고 함께 있는 여성은 너무 미인이며 매력적인 독일어를 쓰고 있었다.      


이틀 동안 관찰해본 결과 방콕에는 미인들이 많다. 태국 여성들은 그들 특유의 온화한 아름다움이 있다. 일단 목소리부터 나와는 음역대가 다르다. 나는 피아노 악보에서 왼손으로 연주하는 쪽이라면 동남아시아들의 여성들은 단연코 오른손이 연주하는 부분이다(이 멋진 비유는 이틀 전에 본 조성진의 드뷔시 연주에서 착안했다). 나는 며칠 째 변비로 고생하는 얼굴이라면(실제로는 늘 쾌변하고 있다), 그들은 일평생 변비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얼굴이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는 안경을 쓴 여자는 찾아볼 수 없다. 다들 어렸을 때 눈 관리를 잘 한 건지? 나처럼 어두운 데서 죽도록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 앞에 바짝 붙어 있다가 그러다가 테레비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일갈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지 않았나 보다.   


사실 오늘 쓰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맥주를 마시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 속이 마구 차오른다. 술은 역시 작가의 좋은 친구다. 내 정신 건강을 책임지고 계신 이선생님 말로는 친구의 탈을 쓴 나쁜 놈이라던데. 사실 술보다 이 흥겨운 분위기에 함께 하지 못한 나는, 이 욕구를 아이패드 휴대용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으로 해소하고 있다. 말하고 싶지만 아무하고도 이야기할 수 없는 이 슬픔. 이 공허함을 창작열로 불태우리.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그래서 오늘의 이벤트는 바로 아까 그 마사지 샵에서 있었다.      


풋 마사지용 의자에 앉아 마사지사의 손길에 녹아내리고 있을 때, 샵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 샵은 출장 마사지도 하는 모양인데, 전화를 걸어온 당사자는 외국인이었다. 리셉션을 보는 직원은 태국식 억양의 영어로 호텔의 정확한 이름이 뭐냐, 몇 호실인가, 하는 기본적인 정보를 물어본 다음 이 호텔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확인하고 10분 후에 다시 전화해서 알려주겠노라고 응대했다. 그리고 한번 더 정보를 체크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이 그래서 언제 오는데요? 하는 식으로 물어본 것 같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확인해보고 연락드린다니까요.”     


뚝.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알지 못하는 태국어를 몇 마디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마사지사 모두들 큭큭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응대하던 그녀는 아마도      


“아놔 이 미친놈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욕을 했으리라. 그녀들의 귀여운 웃음에 나도 몰래 따라 웃었다. 대놓고 웃으면 당황해할테니.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다. 이 작은 해프닝으로 단박에 이 도시에 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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