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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7. 2019

셸든의 누나를 만났다

6/10 Day2. 자정 

아까 있었던 귀여운 해프닝에 대해 혼자 생각하다 큭큭대고 있자니, 앞에 앉아 있던 독일인들이 그만 마시고 자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일행인 여자의 술은 사주면서도 남자들은 칼 같이 맥주값을 나눠서 낸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독일의 정신인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무장해야 두 번의 전쟁에서 지고도 유럽을 대표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브라보. 그들이 나가고 나니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든다. 무슨 말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대화를 즐겁게 듣고 있었는데 아쉽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했는지 물어볼걸.  


어제 갑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이 있다. 밥 먹을 때는 아이폰을 들여다보지 말 것. 그래서 가져온 잡지나 책을 읽으며 밥을 먹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여행 중에 만난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맥주도 다 마셨겠다, 슬슬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500바트 이하는 카드 결제가 안 된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아 이천원도 카드 결제가 되는 한국이 좋다. 내 돈을 갈취하면서도 친절함을 잃지 않는 직원에게 어떤 걸 추천하냐고 물어봤더니 시음하겠냐고 해서 시음까지 하고 무난한 맥주를 한 잔 가득 시켰다. 대충 마시고 가려고 했는데 너무 맛있네. 두 발로 제대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다행히 호텔이 기어가도 1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기어가고 있으면 누군가 방까지 끌고 가주겠지. 이 여자 뭘 처먹었길래 이렇게 무겁냐고 욕을 욕을 하면서.      


방금 전에 너무 이상한 조합의 손님들을 봤다. 매우 핸섬한 젊은이 한 명과 나이가 지긋한 역시 할아버지와 아주 아름답고 살결이 많이 보이는 옷을 입은 태국 여성. 이 셋은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걸까. 생각할수록 궁금하다. 그들은 백인 남성들이었다. 방콕에서 펍이나 마사지 샵 혹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여성성을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팁 문화가 퍼져 있는 곳도 아니다. 여성성을 어필한다고 한들, 팁으로 짭짤할 정도의 부수입을 올릴 수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나 현지처(이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 그러하다)로 살고 있는 여성들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가꾸는 일을 결코 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대학교의 졸업 앨범 촬영을 제외하면 화장을 하면서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내 모습을 본 적도 없고, 그런 것을 별로 즐겁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뷰티 유튜버는 내게 외계인 같은 존재다.      


아까 목격했던 그 태국 여성은 이 거리에서 일하는 여자인 것 같다. 방금 또 다른 외국 남성과 정답게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또 모기에 물렸네. 젠장. 내일은 모기 기피제를 뿌리고 나와야겠다. 방금 그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오늘 밤은 누구와 어떻게 보낼까. 그녀에게 돈을 지불하는 남성들이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까. 월요일에도 이렇게 흥겨운데 주말에는 도대체 어떨까. 여자를 돈을 주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와중에 부르카를 쓰고 길을 건너는 무슬림 여성은 이 광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애초에 저 여성은 세상에서 가장 죄많은 도시에 무슨 연유로 왔을까. 왜 자정이 다 된 시각에 부르카를 쓰고 홀로 환락가를 걸어다닐까.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여기서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났다면 나에겐 어떤 선택권이 주어졌을까. 그것보다 사립 대학교에서 인문학도랍시고 희희낙락하며 맘편하게 문학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세 명의 독일인들이 앉았던 자리에 근사한 차림의 커플이 앉은 걸 발견했다. 그들 역시 독일어로 말하기에 남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용기내서 멋진 여성에게 말을 걸었더니 그녀는 스위스 항공에서 일하는 승무원이라 했다. 역시 승무원인 그녀의 남자친구와 잠시 스탑 오버로 방콕에 들렀는데, 카오산 로드에 꼭 가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했다. 나는 너무 더워서 못 가겠어요 잉잉, 하고 투정을 부렸지만 그녀의 말대로 한번은 가보지 않을까 싶다(허나 결국 가지 않았다).      


독일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막연하게 독일 사람이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커플 중 남자는 스위스의 독일 파트, 여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하여 당황했다. 그런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독일어 발음이 꽤나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줬다. 북한과 남한의 억양은 어떻게 다른지 물어보면서. 북한과 남한이 다른 억양의 언어를 쓴다는 것도 알고 있다니, 정말로 영특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은이 글로벌 세계에 화려하게 입성하기 전, 북한과 남한이 존재하는지 아니 그게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매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성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스테파니. 그녀의 남동생은 아주 약한 자폐증상이 있는 무지무지 똑똑한 사람으로 현재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아마 내가 하는 한국어를 들으면 굉장히 기뻐할거라고 했다. <빅뱅이론>의 셸든이 실재하고 있다니 왠지 모르게 감격했다.    

  

“물리학자라니 정말 엄청나네요. 저는 물리학에 대해 아는 거라곤 중력 밖에 없어요.”

“저도 그래요, 물건을 놓으면 떨어지는 정도 밖에는 모르는 걸요?!”      


물리학을 하나도 모르는 스테파니와 나는 잠시 동안 신나게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녀의 멋진 남자친구가 테이블로 돌아왔기에 황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스테파니, 당신은 내가 방콕에 와서 제대로 대화한 첫 번째 사람이에요. You just made my day. 평소에는 쓰지도 않고 생각도 나지 않는 표현인데, 번개처럼 떠올라 스테파니에게 이 문장을 건넸다. 펍에 앉아 아이패드로 글을 쓰고 있는 내게 그녀는 지금 일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언젠가 아마도 저는 작가가 될 거에요. 당신과 당신의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제 글에 써도 될까요,라는 물음에 호쾌하게 그렇게 하라고 대답해준 그녀의 미소가 근사했다. 약간 취해서 승무원이라는 영어 단어의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승무원이 되길 원하죠!라고 기분좋게 대답해줬다. 이번 일정은 취리히에 취항하는 노선이고, 방콕에는 이틀 정도 머물고 있으며 이 도시에는 대략 17번째 방문하는 거라고. 스테파니는 정말로 멋졌다. 세상은 이렇게 멋진 여자들로 가득 차 있다. 요새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멋진 여자들 옆에 나도 있다고. 보잘 것 없지만 뭐라도 해보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멀고 먼 곳으로 날아온 대책 없는 삼십대 중반의 남한 출신의 비혼 여성도 있다고. 남한의 여성은 서른이 넘으면 주부가 되거나 여행자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는 설마 그렇겠어,하고 넘겼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일단은 여행자가 되었다.      


내가 글을 쓴다고 하니까 스테파니의 눈이 더 반짝거리는 듯 했다.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에서 본 구절인데, 독일 사람들은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작가를 존경하는 나라라니 매력이 터질 수 밖에. 그들이 수십 년 전에 수백 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베를린의 동사무소(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관공서)에는 예술가를 위한 창구가 따로 있다고 했다. 아니 얼마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길래(실제로 베를린에서 확인해본 결과, 평일 낮에도 밖에서 노닥거리는 인구가 굉장히 많은 걸로 봐서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방콕은 밤이 되어야 그 색채가 드러나는 도시같다. 겨우 하루 머물렀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월요일 자정이 넘었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길을 채우고 있다.      


이상하게 혼자 술을 마시는 동양인 여자는 찾아볼 수 없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 주변에는 없는 건지. 다들 카오산 로드에 있는 건지. 몇 차례 관찰한 결과 나 같은 여행객은 없는 것 같다. 신기한 현상으로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을 계속 음침한 눈으로 바라봐도 되는 건지 어쩐 건지 잘 모르겠다. 나머지 맥주 한 잔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 펍에서 나가는 길에 스테파니에게 인사를 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길.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다. 두 번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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