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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7. 2019

내 앞에서 무릎꿇지 말아요

6/11 Day.3 오후 2시 

아침부터 아로마 마사지를 받고 와서 쓰다.


방청소를 해주겠다는 메이드의 부름으로 9시 반에 겨우 눈을 떴다. 내가 침대에서 정체불명의 소리를 웅얼거리고 있자니 나보고 괜찮냐고 물어보던 친절한 그녀. 게으른 사람은 살면서 거의 못 봤겠죠. 게으름이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접니다. 에헴. 어제 발 마사지를 받고 매우 만족한 마음에 아침부터 찾아가 아로마 전신 마사지를 받았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된다고 하여 당황했다. 카드 결제는 역시 한국이 최고다. 마사지를 받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아예 비싼 음식점에서 마구 돈을 쓰는 수밖에 없다. 현금을 안 쓰고 버텨보는 것은 선택지에 없다. 흐물흐물해진 몸과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오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날씨가 비가 왔다가 흐리다가 할 것 같다. 한번 쏟아지면 잠시 소강상태인 듯. 배고프다. 귀찮으니 호텔 레스토랑에서 팟씨유를 먹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밥을 먹고 어제 그 카페에 가서 감동적인 아이스 라떼를 사먹어야지. 아니면 무지 유명하다는 디저트 카페에 가볼까나. 저녁은 혼마구로동을 먹어야지. 하이볼도! 


술 마실 생각에 들떴다. 어제 그렇게나 퍼마셨는데 우울한 기분이라곤 요만큼도 없다. 내 상태가 드라마틱하게 나아진 것 아니고, 여행지라서 딱히 우울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잠도 놀라울 정도로 푹 자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는 번잡하고 피곤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나는 사람들과 대차게 싸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 꿈에서라도 분노가 분출이 되는 건지. 이제 배가 매우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어야겠다. 팟씨유가 손바닥만 하게 나오면 안 되는데. 조심조심 들어간 호텔 1층의 식당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팟시유와 망고 음료를 배부르게 먹고 잠이 마구 쏟아져서 낮잠을 2시간이나 자버렸다. 겨우 눈을 뜨고 어제 올데이 브런치를 먹었던 커피 클럽에 가서 똑같은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려는 찰나, 아이스 초콜렛으로 마음을 바꿨다. 단거, 단거를 먹어야 했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방콕의 남자들도 여자들 못지않게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데, 내 주문을 받은 남자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태블릿으로 주문을 받는데 내가 주문한 메뉴를 한참동안 못 찾아서 약간 민망했다. 그가 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무릎까지 꿇고 주문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했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것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이봐요, 내가 마음이 불편하니 일어나세요! 하고 일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튼 매그넘을 영접하고 황송한 마음에 마음속으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오늘의 독서는 하루키의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다. 95년 경 아사히 신문에 매주 연재하던 칼럼을 엮어 만든 책인데 빵빵 터지는 부분이 많다. 특히 수영장 락커룸 벽에 다른 사람 험담을 하지 말라는 공고가 붙었다는 내용은 아이스크림을 뿜을 정도로 재밌었다. 

숭어같은 폼은 좋은거 아닌가... 

당시 하루키는 옴진리교 사린가스 중독 사건의 여파를 다룬 인터뷰 책인 [언더그라운드]를 집필 중이었다. 그 어둡고 무거운 내용의 글을 쓰면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소중한 원고가 바로 이 칼럼이었다고. 나 역시 몇 해 전에 [언더그라운드]를 몇 페이지 읽다가 덮어버렸다. 아직도 그 책은 얌전히 책장에 꽂혀 있는데 언제 다시 읽을 용기가 생길지는 모르겠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큭큭대며 웃다가 나도 모르게 굳어버린 내용이 있었다. 한 출판사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일본 현대 문학 전집을 출판하는 기획을 했다. 문제는 담당 편집자가 하루키에게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그의 이름을 홍보에 사용하고, 전집에 들어갈 소설 역시 마음대로 정해버린 것이었다. 일이 끝난 다음에 하루키에게서 허락을 구하려고 했지만 하루키는 절대로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아마 그 편집자가 직접 하루키를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고 전집에 들어갈 소설을 변경하겠다고 했으면 하루키는 허락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집자는 더 쉽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루키의 작품을 심사했던 문학계의 거장에게 연락을 해서 하루키의 마음을 돌린다던가,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해결하려고 했다. 하루키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수년 후, 하루키는 지인에게 그 편집자가 전집 기획을 하는 도중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사람의 자살의 이유가 단순히 하루키가 허락을 해주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루키 역시 그 때 나의 태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지면에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그의 선택과 생각이 옳다고 본다. 


왜 이 이야기에 일순간 몸이 굳었냐면 얼마 전에 수미(가명이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죽었을 때 스무 한 두 살 쯤 되었을 거다. 자세히 계산은 할 수 없지만 아마 그 언저리의 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몇 년 전 어느 대안학교에서 일할 때 그 애는 17살 혹은 18살이었던 거 같다.


벌써 4년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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