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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8. 2019

나도 안다, 내가 냉정한 거

6/11 Day 3. 오후 3시 

그 아이를 수미,라고 이름만 부르기에는 우리 사이가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 이수미,라고 성까지 붙이는 것도 1년 넘게 가르친 학생한테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아 어색하다. 일단 수미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다.


내가 대안학교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준 것이 바로 수미와 그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난동이었다. 거기에 뒤에서 그 모녀를 조종한 어떤 인간이 있었고, 내가 공격당할 때 자신은 슬며시 뒤로 빠졌던 직장 상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내가 얼마나 엿을 먹었던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큰 앙심을 품지 않고 그냥 넘어갔지만, 그곳에 계속 있다가는 심각하게 불행해질 것 같았다. 1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하고 그 직장 상사와는 퇴직금이 입금되던 바로 그 날 모든 인연을 끊었다. 내 인생에서 잘한 거라곤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이때의 결단은 3위 안에 들 정도로 옳은 결정이었다.


이제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그 아이는 극도로 불안한 여자애였다. 중학교 2학년 쯤 학교에서 칼부림을 하고 자퇴를 한 후 대안학교를 찾아왔다. 학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전말도 나는 정확히 모른다. 대강 기억나는 바로는 수미의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걸 본 수미가 주동자인 애한테 커터칼을 휘두르며 약간의 상처를 입혔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수미는 자신이 도와줬다고 믿은 친구가 이 사건 이후에 자신과 교류를 끊었다고 괴로워했다. 납득이 가기도 갔다. 어떤 여중생도 다른 애한테 칼을 휘두른 애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칼의 끝이 어쩌면 나한테 향할 수도 있기에. 


하지만 이미 ‘정상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던 수미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다. 자신을 배신했다는 분노에 피해망상이 겹쳐서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다고 했다. 수미의 병명은 조울증이었다. 내가 그 아이를 가르쳤을 때 수미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3번, 꽤 많은 양의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대학 병원 신경정신과에서 강도가 높은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복용했고, 수미의 엄마도 마찬가지로 상담 치료와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나마 엄마는 아이보다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착각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그 날, 수미는 어쩐 연유인지 나를 향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쌍욕을 했다. 사람이 미치면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잠시 생각에 잠길 정도로 심각한 이상 행동을 보였다. 다행히 나와 그 아이 주변에 날카로운 물건은 없었다.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한참이나 내게 분노를 보이던 수미가 진정하고 나자 나는 그 아이를 잘 다독여 집에 보냈다. 학교 문을 나서면서 그 애는 내게 이렇게 행동한 것에 사과를 했다. 그래, 마음이 아픈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수미가 선생님인 내게 쌍욕을 하고 분노를 표출했다는 것을 그 애 엄마에게 전화로 알리자 그녀는 오히려 내게 더 화를 냈다. 자기가 이제까지 참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자격이 없고 수미가 선생인 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냐며 자신의 딸과 마찬가지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나는 수미가 그런 이상 행동을 했을 때보다 이 엄마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오 어머님, 당신 딸이 제게 이유 없이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내가 아이를 학대하고 욕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수미의 엄마는 당장 지도 신부님을 만나(내가 일하던 곳은 가톨릭의 모 교구 소속이었다) 내가 선생으로서 보여준 수많은 문제 행위를 고발하겠다고 소리질렀다. 나는 어머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증거 자료가 있다며 기세도 등등하게 신부님과의 면담 약속을 잡았다. 내게도 소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기에 면담 장소는 학교로 정해졌다. 착잡했다.


그렇게 이수미의 엄마, 지도 신부님, 나, 나의 직장 상사 이모씨와 그리고 이 모녀를 조종했던 김모씨까지 5명이 모여 이 사달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사람한테 시달려야 하지? 이 사람은 왜 자기 딸보다 더 미친거지? 이럴 시간에 우리 엄마 소고기 사드리는 게 지구의 평화를 위해 더 나은 일 아닌가?


그녀는 보란듯이 내 앞에서 A4 용지를 꺼내서 그동안 내가 저질렀다고 하는 문제 행동을 읽어나갔다. 학생들 앞에서 저급한 단어를 쓴 것. 수업을 하다가 퇴근 후 회식할 때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그런 종류의 말이었다. 이 모든 단어 사용은 이모씨와 김모씨가 주로 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내가 다 뒤집어썼다. 


학생들이 봉사활동은 하는 사이에 교사들은 네일 샵에서 관리를 받은 것.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수미는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다른 학생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라고 시킨 것.


학생들에게 간식 먹은 설거지를 시킨 것. 참고로 다 본인들이 먹은 거다.


대안학교는 어린이집이 아니고, 나는 어린이집의 보육교사가 아님에도 아이들이 집에 가는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선생님들이(나와 이모씨) 매일같이 만들어주는 떡볶이 등의 간식 설거지를 하는 것은 천하의 몹쓸 짓이었다. 매일 점심을 먹여주고 고등학교의 모든 과목 공부를 가르쳐주는데 본인들이 먹은 간식 정도는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옳은 처사다. 나는 그 때의 학교 방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바로 김모씨와 이모씨가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한테만 문제가 될 줄이야. 이 아줌마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했던 거지? 식모? 


이런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 웃음과 한숨이 터져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애를 키우는 거지? 자신을 어떻게 한 아이의 엄마라고 칭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녀는 담당 신부님께 어떤 기준으로 교사를 고용하는 건지 낱낱이 알려달라고 했다. 수준 이하의 교사에게 자신의 아이가 교육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들을수록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그날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저는요 신부님- 우리 수미가 선생님한테 욕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안도했어요. 우리 수미가 정-말로 무기력하고 에너지가 없었는데 그래도 욕을 할 정도의 기운은 생겼구나, 해서요.”


여기서 끝났다면, 그리고 이모씨와 김모씨가 나서서 사실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 안나 선생님은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면 나는 그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사건을 늘 마음에 새기며 매순간 주의하며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아름다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는 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늘 알고 있었지만 매 순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뒤통수를 맞기 마련이다.


직장 상사인 이모씨는 모든 것이 아랫사람 관리를 못한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교사들이 사용했다는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 ‘언니, 이건 제가 아니고 언니랑 김모 언니가 한 거 잖아요, 그렇잖아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내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나중에 말했다.


“미안하다. 그 자리에서 내가 그런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 신부님 앞에서 교사 둘 다 문제가 있어 보이면 안 되지 않겠니?” 


그래서 모든 잘못은 다 내가 한 것이 되었다. 예전에 봉사자 교사였다가 그만둔 김모씨의 경우는 더 심각했는데, 알고 보니 수미와 수미 엄마를 부추겨서 나를 몰아내자는 모종의 계획의 배후에 그녀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문제가 있는 교사로 낙인이 찍히면 자진해서 그만두거나 혹은 해고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자기 자신이 구세주가 되어 다시 학생들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건 수미가 직접 한 말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당시 수미와 같이 어울렸던 다른 학생들이 나중에 앞 다투어 말해줬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요 선생님, 이수미 걔 진짜 이상해요. 선생님 여기서 잘리게 해서 김선생님 다시 돌아오게 하자고 엄마랑 계획 짠 거였대요. 결국 그 여자애들의 우정의 깊이도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수미 엄마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혀 앉아 있다가 결국 한 마디 했다. 어머님, 수미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게 아니란 건 알고 계시죠? 나의 말에 격분한 그녀는 신부님과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내 앞에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와서 무슨 못할 말씀이 있으시다고요,라고 비아냥대고 싶었지만 자리를 비켜줬다. 수미와 수미 엄마의 마음을 들쑤시면서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던 김모씨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저 좋게 좋게 내가 그만두는 것으로 결론이 날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신은 다시 자애로운 얼굴로 이 불쌍한 아이들을 구원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됐다. 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수미의 또 다른 문제는 바로 병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거짓을 말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경우나 문제가 되긴 매한가지였다. 수미 엄마는 자신의 딸이 하는 말을 무조건 믿었기 때문이었다. 명석한 지도 신부님은 이 모녀의 문제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리시고 수미의 엄마를 잘 달래서 집에 보냈다. 내게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다행히도 내가 그렇게까지 몰상식한데다 악랄하고 못된 년은 아니라는 믿음은 갖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더 이상 이 끔찍한 곳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까지 미칠 지경이었다. 그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이 문제는 흐지부지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김모씨는 대안학교에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했고, 나는 상사였던 이모씨에 대한 적개심을 잘 감추고 버틸 수 있었다. 


이모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매우 많지만 도저히 짧게 정리를 할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때까지 우리는 죽고 못사는 친자매보다 더 친한 사이였으나, 내 눈에 씐 무언가가 바로 그 날 벗겨진 것이다(아니다, 사실은 한 달 후, 한 번 더 봉변을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덜 떨어진 인간이었다)친가와 외가의 조상님께서 도와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해 봄, 가르치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다 합격을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사를 했다. 내가 퇴사하고 난 다음에 대안학교는 잠시 문을 닫았다. 이모씨는 다른 업무를 하도록 발령을 받았는데, 모두가 쉬쉬했지만 좌천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그녀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고심을 거듭한 신부님이 겨우 단체를 설립해서 그녀를 보낸 것이다. 이모씨는 그 곳에서 일하는 것을 증오했지만, 딱히 퇴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어거지로 출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녀의 후일담을 듣고 나서 나는 저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수미는 마포의 어딘가에 있는 대안학교로 옮겼다. 나는 그 애를 1년이나 더 봐야 했다. 새로 옮긴 학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오랜 시간 수업을 받아야 하는 타이트한 일정의 대안학교였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일도 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그리고 얼마 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이에게 나는 왜,가 아닌 어떻게,를 물어봤다. 수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많이 놀랍지는 않았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내가 가르칠 그 무렵에 팔과 다리에 자해의 상처가 남아 있었으니,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너무 냉정한 표현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비극을 전해 들은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조금 이상한 점은 있었다. 나중에 접하게 된 자해 행동을 하는 여자애들은 보통 그 상처를 감추기 마련이었다. 수미는 그 상처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이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상처를 봐, 내가 얼마나 아픈지 봐봐. 내가 얼마나 미쳐있는지 보세요, 선생님. 내가 불쌍하지 않아요? 왜 나를 예뻐해 주지 않아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결코 수미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었다. 내가 많이 아프니까 봐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내 인생에 한 명이면 충분했다. 


우리 엄마. 


나는 우리 엄마도 좋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엄마에게 주저 없이 내 심장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엄마를 좋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는 예전의 여유와 빛을 거의 다 잃어버리셨다. 딸로써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친구들에게 내 속내를 터놓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런 내가 일터에서 만난 학생에게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곱게 자라 악의라는 감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나는 애정을 주지 못한다.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천하의 쌍년이어서가 아니라,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수미 엄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마음이 많이 아픈 아이들을 돌보기에는 결격 사유가 있는 선생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섣불리 덤볐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그때는 그저 억울했지만 지금은 받아들이게 됐다.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다. 보통 학생들은 나를 좋아하니까 이번에도 내가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대로 흘러가려니. 너무 순진하고 또 멍청했다. 순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수미가 왜 그렇게 나를 증오했는지 나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 아이는 그 날 갑자기 내게 쌍욕을 하며 발작적으로 분노를 터뜨렸고, 며칠 후 아주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 애의 엄마에게서는 끝내 사과를 받을 수 없었지만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수미는 끝까지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자신을 화나게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 애의 엄마가 문제를 삼은 것은 다 다른 학생들에게 했다는 나의 언행이었다. 그것마저 사실이 아니었지만. 정작 수미가 나로 인해 불이익을 보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하다못해 내 욕을 하며 길을 걷다 넘어져 다친 적도 없었다. 단순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모녀였으니까 이래저래 만만한 내게 그랬던 거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김모씨나 이모씨도 매한가지였으니. 


다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증오어린 눈빛으로 욕을 먹은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때 나도 충격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평판이 걸린 상황에서 얼마든지 나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에게 수년간 의지했던 사실이 더 서글펐다. 그리고 결국 수미가 그렇게 스스로 생을 마감을 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씁쓸해졌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 아이에 대한 나쁜 말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여행지에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가뜩이나 이렇게 뜨겁고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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