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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7. 2019

관광이 아닌 여행을  

6/20  Day 2 

날이 조금 시원해지기를 기다리며 호텔 침대에 앉아서 쓰다. 오후 5시. 


정오 가까이 되어서야 일어나 타이베이역 옆의 큐스퀘어에서 점심을 먹고 지하에 있는 말차 전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말차 쉐이크를 마셨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거다, 나는 이것을 먹기 위해 타이베이에 온 것이다.      


큐스퀘어 건물 5층에 영화관이 있기에 뭐 재밌는 거 상영하나 보러갔더니 뜬금없이 <악인전>을 상영하고 있다. 이거 한국어로 하는 거죠? 중국어 더빙 아니죠?? 물어보면서 직원들을 괴롭혔다. 다음 주에는 기생충도 개봉한다고 하니 출국 전에 봐야겠다(이렇게 써놓고 이 글을 올리는 아직까지 두 영화 다 보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오기 전에 타이베이 메인역에 편의점에 들러 도라에몽이 가득 그려진 이지 카드를 사는 데 성공했다. 교통카드지만 스타벅스에서도 쓸 수 있다고 하니 커피가 급할 때 써야겠다. 잠시 밖에 있었는데 너무 더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우버를 타고 복귀했다. 택시 기사들 모두 이지 카드로 결제할 수 없다고 그래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체감 온도는 46도.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무사히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멍하니 누워서 <그래비티>와 <스타트렉>을 보다가 저녁에 가볼 장소를 탐색했다. 용산사가 10시까지 여는 줄은 몰랐네. 기운을 낸 김에 구경을 하고 근처에 예쁜 거리가 있다고 하니 슬슬 둘러본 다음 저녁을 먹고 숙소 근처의 펍에 가 볼 생각이다.     


내일은 미니어처 박물관에 간 다음 영화를 봐야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편하면서도 새롭다.    

  

자정, 타이완 맥주를 마시며 쓰다.      


6시가 되어 그래도 조금 덜 덥겠지, 하고 밖에 나갔으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밥을 먹고 걷는 편이 좋을 것 같아 3대 딤섬집으로 유명한 ‘까오지’로 이동하여 가장 유명한 메뉴인 성젠을 먹었다. 나머지 두 식당은 모른다... 여튼 '까오지'는 그 인기에 걸맞게 여러 지점이 있으니 구글에 검색해서 적당히 자신의 상황에 맞는 곳으로 가면 된다. 나는 미감이 떨어지는 편이고 본점과 분점을 구분해서 밥을 먹는 성격이 아니라 아무데나 가까운 지점을 이용했다. 

이거다 이거!!! 이걸 먹어야 한다! 

성젠은 4년 전, 가혹한 일정으로 컨디션이 엉망이 되었던 리타언니를 앞에 두고 나 혼자 꿀떡꿀떡 집어 삼켰던 바로 그 음식이다.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튀기듯이 구운 딤섬인데, 아무리 나라도 10개는 먹을 수 없어 8개만 먹고 일어났다. 다음에 또 와서 다른 음식을 먹어 보겠다 다짐했다. 리타언니는 내가 보낸 음식 사진을 보고 울었다. 그때도 못 먹고 지금도 못 먹는구나, 한탄하면서.      


이지 카드를 사용해보고자 버스를 타고 용산사로 향했다. 가는 길은 쾌적했으나 버스 안에 소음이 심각하여 약간 혼이 나갔다. 밤에 더 아름답다는 용산사는 저 마다의 고민과 소원으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소란스럽게 인증샷 찍기에 급급한 한국의 관광객들도 있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같은 건 애초에 뇌 속에 탑재되지 않았나보다.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리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용산사에 돌아다니는 예쁜 고양이가 있기에 걷다가 멈춰서 구경했더니, 어떤 아줌마가 뭐라 뭐라고 하면서 나를 밀쳤다. 중국어로 말해봤자 내가 알아들을 리가 없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매우 당황했다. 아줌마의 눈빛이 무척 형형한 걸로 보아 정상은 아닌 듯 했다. 용산사는 타이베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이자,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그런지 절 주변에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밤 늦은 시간에 오래 머물 장소는 아닌 것 같아 어제 알아뒀던 호텔 근처의 펍으로 향했다. 한참 지하철에서 노선을 고민하다가(노선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니, 바로 옆에 있던 지하철 안전 요원인 듯한 훤칠한 총각이 도와주고 싶어서 몸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오기가 생겨서(?) 물어보지 않고 지하철에 탔다. 다행히 올바른 방향이었다), 구글맵에 나온대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엄청난 더위였다. 설마 여기가 방콕보다 더 덥겠어? 생각했던 내가 순진했다. 방콕보다 더 더운 곳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주 작고 힙하다는 펍에는 이미 보통 내공은 아닌 손님들로 차 있었는데, 조금 늦게 왔으면 앉을 자리도 없어 돌아갈 뻔했다. 정말 딱 술만 파는 곳이었다. 주인장은 오다기리 조 느낌의 남자였고, 알바생은 아주 작은 체구의 귀여운 여자애였다. 주인은 자기 친구랑 노느라 바쁘고, 혼자 온 내게 가끔 말을 걸어주는 여자애가 고마웠다. 트립 어드바이저 후기에 친근한 직원들이 매력적이라고 했는데 진짜였다만, 너무 작아서 바에 오래 앉아 있기는 힘든 분위기였다. 생맥주 한 잔을 마시고 일어나는데 여자애가 닝샤 야시장에 꼭 가보라고 하여 갔다. 나는 이토록 쉬운 인간이다.    


야시장이라고 하지만 뭐 먹을 거나 있겠어, 생각했는데 망고 잘라놓은 거 보자마자 홀린 듯이 한 봉다리 사고(나는 마치 우리 엄마처럼 말해서 순간 소오름이 끼쳤다. 사장님, 이거 맛있어요? 이 망고 좋은 거에요??하고 두 번이나 물어봄. 그럼 당연히 맛있다고 하겠지 뭐라 하겠는가) 땅콩 아이스크림 보자마자 사서 입에 물고 구경했다. 엄청난 맛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시장 음식과 풍경은 가이드북과 여행 관련 앱과 까페와 블로그에 나온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정말 사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닝샤 야시장은 호텔과는 5분 거리였지만 너무 더워서 또다시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째서 이렇게 덥지? 이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지? 나는 대체 이 더운데서 뭘 하고 있지? 숨을 몰아쉬며 호텔로 들어왔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이게 말이 되는 날씨인가. 어째서 이 나라의 사람들은 이러고 있는 것인가. 


오후에는 우버 덕분에 지옥불 같은 더위에도 호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방콕에서는 근본 없이 돌아다녔기에 이번에는 가이드북과 여행 어플에서 추천하는 곳을 가보려고 시도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식당과 카페 등등. 그 결과 스스로 여행객이라는 자각은 들지만, 정말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심각하게 더워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내일부터는 진심으로 재미있다고 느껴질 만한 곳만 추려서 가야겠다.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유명하다는 카페도 가고 식당도 가고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가득 계획을 세웠는데 아무래도 늘 하던 대로 해야지 싶다.       


타이베이에서도 글을 쓰려면 더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더 깊이 봐야 한다. 오늘 내가 했던 건 관광이지 여행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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