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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29. 2019

그들은 불쾌지수를 모른다

6/30  Day 12. 

타오위안 공항 게이트 앞에서 쓰다.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려고 한다. 기껏해야 마음의 준비다. 예를 들어 공항에 갔는데 모종의 이유로 내 항공권이 취소됐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공항 근처 싼 호텔을 찾아 하루 더 놀다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게 보통의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하지 않는 생각인 건 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을 때 일이 예정대로 흘러가면 더 뿌듯하다. 지난 십 년간 불행에 단련되었기에 생겨난 버릇이었다. 언제나 맹수의 자세를 유지하도록.  


4년 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뻔 했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왔다.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미친년처럼 보딩 게이트 앞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비행기 언제 출발하나요. 집에 보내주세요. 집에 가고 싶어요. 흑흑. 


대만은 겨울에 놀러와야 한다. 이 미친 놈의 날씨. 어제 개빈이 말하는 바로는 요새는 선선한거라고 했다. 8월이 더위의 절정이라는 말에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왜 너희들은 더위를 안타는 것 같냐고 하니 더위를 타는 건 맞지만 이제는 이 기후에 익숙해졌다고 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더니 웃었다. 누구도 이런 더위에는 익숙해질 수 없다. 한국에는 불쾌지수라는 것이 있는데, 대만은 어떤가?(그런 것은 처음 들어본다고 대답했다) 한국은 여름에 사람들이 갑자기 싸움이 붙기도 한다. 너무 더우면 서로 짜증이 나니까 시비가 붙으면 큰 싸움으로 번진다. 개빈은 내가 심각한 뻥을 치고 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진짠데.  


지난 해 여름, 신촌 로터리 횡단보도에서 사람들이 서로 지나가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걸 봤다. 약 20초간 강렬하게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각자 갈 길을 갔다. 마치 무협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날 오후는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어 누구 한 명이 죽었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날씨였다. 6월의 대만은 늘 그런 날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습도까지 굉장히 높아서 3분 만 밖에 있어도 얼굴 전체에 땀이 줄줄 흘렀다. 황급히 땀을 닦고 나면 얼굴이 막 간지러웠다. 팔도 다리도 따가웠다. 땀띠가 나는 것도 같았다. 왜 대만 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견디며 사는가? 왜 정부에 항의를 하거나 시위를 하지 않는가? 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되도 않는 의문을 계속 떠올리며 간신히 돌아다녔다.


이제 50분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너무 일찍 왔다 싶었더니 체크 인 하는데 30분을 넘게 기다렸다. 속이 터질 뻔한 나를 빼고 모든 사람들은 다 평화로워 보였다. 이 성급한 습성을 어찌 조절할 것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하릴없이 있다가 아침 식사로 대만식 고기 덮밥을 먹었다. 일리 커피를 사기엔 돈이 조금 모자라서 캔커피를 사서 마시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돈은 30위안. 정말 알뜰하게도 남겼다. 


오늘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술을 대차게 마신 덕에 약을 먹지 않았다. 그랬더니 두 시간 뒤에 깼다. 너무 슬픈 꿈을 꿨다. 그 외로움과 슬픔이 사무치게 다가와서 한참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명히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어째서 였을까. 어제 배우 전미선씨의 부고를 접했다. 엄청난 인기를 누린 탑스타는 아니어도 그녀 정도면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커리어를 쌓았던 사람인데. 개봉을 앞둔 메이저 영화도 있고 지금 무대에 올리는 연극도 있는데. 봉준호 영화에 2편이나 출연했는데. 그녀의 남편과 아들과 부모님은 남은 평생 죄책감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나처럼.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나니 불안해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즐겁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주 동안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홀로 놀고 있자니 순간순간 심각하게 우울하고 불안할 때가 있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인 걸 아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계속 술을 마셨다. 너무 많이 마신 날에는 간에 무리가 될 것 같아 약을 먹지 않았다. 당장 2주 뒤에 다시 먼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데 이런 정신 상태로는 안 된다. 강박적으로 행복해야 한다고 세뇌할 필요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인생의 휴식 시간을 그저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돈 걱정은 가을부터 하도록 하자. 이제 다시 여행을 준비해야할 시간이다. 


이 여름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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