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보고
열세 시간 반 동안 화장실 말고는 갈 데가 없다.
거의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 하며,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킬 수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다행히 정해진 식사 시간 외에도 원하면 먹거리는 제공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것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딱 열세 시간 반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망중한을 즐길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읽으려고 다운로드한 책을 펼쳐보니 오디오 북이었다. 다운로드하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독서 계획을 날린 적이 있어 이번엔 신경 써서 미리 준비했다는 게 잘못 다운로드한 오디오 북이었다. 오디오 북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는 슬그머니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유일한 옵션이 된 영화를 고르다 포스터가 예쁜 "비와 당신의 이야기(2021)"에서 시선이 멈춘다.
마침 출출한 시간이라 여기저기서 나는 라면 냄새가 옛날 극장에서 나던 오징어 냄새를 연상시킨다. 극장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영화의 플레이를 눌렀다.
2011년 12월 31일 손수건과 편지, 우산을 가지고 공원 벤치에서 비를 기다리는 영호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8년 전 봄, 입시 학원에서 만난 영호와 수진은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진다.
영호가 떠올리는 추억 속 한 장면에 보고 싶은 초등학교 동창이 있었다.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다 넘어진 영호가 수돗가에서 상처를 씻고 있을 때, 한 여자 아이가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는 장면이다.
체육복에 있던 '공소연'이란 이름을 기억해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된 영호는 소연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답장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 그 편지는 오랜 지병으로 대화도 움직임도 불가능한 소연을 대신해 동생 소희가 쓴 편지였다. 소희는 편지 교환에 질문 금지, 만나자고 청하기 금지, 찾아오기 금지의 조건을 건다. 대신, 12월 31일에 비가 오면 만나기로 한 그들은 그 희박한 가능성 앞에 행복한 기다림의 편지들을 보낸다.
수돗가에서 어린 영호와 소연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손수건을 건네는 소연에게, 자신은 청군이니 백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영호. 그 말에 소연은 얼른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뒤집는다. 모자에 드러난 청색을 보고서야 손수건을 받는 영호. 청군과 백군으로 갈려 경쟁하는 상황에서, 그 또래 아이들에게 '넌 백군 난 청군'보다 더 큰 가치는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적군을 돕는 소연의 마음과 그 장면을 잊지 못해 편지를 보내는 영호의 마음은 같은 결이다.
우산을 만들어 파는 영호의 직업은 비와 기다림을, 헌책방을 하는 소희의 직업은 추억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소희는 소연에게 영호의 편지들을 읽어준다. 전화기 너머 영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연은 눈물을 흘린다. 오랜 시간 병석에 있던 소연은 친구가 몹시 그리웠을 것이다.
편지에 소희라는 자신의 이름을 썼다 지우는 소희. 영호와 소희는 약속을 어기고 서로를 찾아가 보지만 엇갈리고 만다.
오른편과 왼편을 뒤집어서 쓴 소연의 편지는 하늘에 비춰보아야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서 편지가 언니의 것도 그렇다고 자신의 것도 아니라는 소희의 마음을 읽었다. 모양들이 햇빛을 받아 글자가 되는 작은 기적이 12월 31일 비가 내리는 기적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영호는 벌써 오래전 소연이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작은 기적과도 같은 반전 - 언니의 체육복을 빌려 입고 운동회에 갔던 소희. 영호의 추억 속 그리운 친구는 소연이 아니라 소희였다.
2011년 12월 31일 비 내리는 공원 벤치 영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소희의 자동차 불빛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 영호와 소희, 소연, 그리고 수진의 기다림의 이야기. 어쩌면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의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낡고 오랜 것들, 떠나버린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시 지금의 삶에 다가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영화였다.
다 보고 나서도 잔상이 남아 마치 한 편의 동화 같기도 했다.
잘못 다운로드한 책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서로 만나지 말고 평생 편지만 하자던 친구 J가 못 견디게 생각난다.
졸업 후 우린 정말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대신 고운 글씨의 편지들이 늘어갔다.
결혼 후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게 된 J.
서울에 머무는 동안 그녀를 찾아 손편지를 보내고 싶다.
내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