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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Sep 13. 2022

잘못된 만남

초등학교 3학년, 만 아홉 살. 내겐 마일스톤(milestone)의 시기였다.

마음 안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감정이 확장되고 세상이 조금 더 넓어 보이던 때였다. 

2학년 때까진 내가 생각해도 내가 아기 같았다. 등굣길도 하굣길도 버거워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다 가야 했다. 작은 공기에 담긴 밥 한 그릇도 다 못 비웠고, 아기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들이 아직 방에 한가득이었다.

3학년이 되니 친구들이 한층 성숙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혜서는 착 달라붙는 진바지를 세련되게 입고 다니던 친구였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어서 우리는 늘 붙어 다녔다. 가끔씩 경로 이탈을 해서 해질 때까지 놀다가 엄마한테 혼이 나기도 했다.

혜서와 어울리며 나는 다른 세상에 눈 뜨기 시작했다. 시험공부하는 요령부터 남자 친구 사귀는 법까지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리는 이야기들을 혜서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죽이 잘 맞아 하루 종일 같이 다녔다. 하도 둘이 붙어 다녀서 어깨가 비뚤어지는 게 아니냐는 어른들의 걱정을 듣기도 했다.


3학년이 끝날 무렵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키가 크고 눈빛이 순한 현성이라는 아이였다. 현성이는 공부도 잘하고 친절해서 인기가 많았다.

자리가 가까웠던 현성이와 나는 여러 가지 수업 활동을 같이 할 기회가 많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현성이와 내가 서로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 현성이의 마음이 궁금했다. 현성이도 소문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전보다 더 친해졌다.

혜서는 하굣길에 집에 같이 가며 늘 현성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으며 몹시 즐거워했다.

다른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갈 때도 현성이와 혜서가 늘 곁에 있어 든든했다. 행복한 3학년 시절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4학년에 올라가자 현성이와 혜서는 같은 반이 되고 나는 그들과 이웃하는 반이 되었다. 좀 섭섭했지만, 방과 후엔 만날 수 있어 우정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마자 다리 염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나는 꼬박 한 달 동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퇴원하고 다시 간 학교는 마치 새로 입학한 것처럼 낯설었다. 새로 바뀐 반 친구들과 친해질 틈이 없었던 터라 나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갑자기 어려워진 학과 공부도 낯섦에 한몫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했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힌 건 현성이와 혜서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학교에 오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사이가 돼 있었다.

내가 다시 학교에 가자, 이 난감한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정작 나는 이상하게도 현성이나 혜서와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은 채 4학년을 마쳤다. 혜서와는 병원에 있는 동안 이미 멀어져 있었고 현성이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 어색하기만 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때 내 마음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가족들은 병원에 오래 있었던 탓에 내가 아직 학교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친구를 잃은 슬픔이 더 컸다. 그들이 밉거나 싫어지지 않아서 더 괴로웠는지도 모른다.

학교에 가면 들려오는 현성과 혜서 이야기,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의 시선 때문에 땅으로 푹 꺼지거나 하늘로 붕 솟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이 느릿느릿 기어가듯 지나고 여름방학 무렵,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가 생겼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목소리가 커서 떠든다고 선생님께 자주 혼나던 명랑한 정윤이었다. 그리고 하교 후 함께 집에 갈 친구들도 생겼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고 했던가.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에 가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란 노래를 들으면 초등학교 4학년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복잡했던 내 마음이 생각난다.


그제서야 난 느낀 거야 모든 것이 잘못돼 있는걸

너와 내 친구는 어느새 다정한 연인이 돼 있었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 울었어

내 사랑과 우정을 모두 버려야 했기에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어른과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십 대에 막 들어선 나이, 삶의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한 그때, 이름 모를 감정들도 내 안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인용: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 가사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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