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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Oct 27. 2022

빛과 그림자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반년을 기다려 온 날치곤 좀 을씨년스럽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속에 눈을 떴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일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커피를 마신다. 쓰고 뜨거운 액체가 훑고 지나가는 목 언저리에 열린 창으로 뛰어든 빗방울 하나가 차가운 흔적을 남긴다.


약속 시간 15분 전에 도착한 거리는 여전히 비에 잠겨 있다.

오는 길에 택시 기사와 주고받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사이 J에게서 문자가 온다. '나 A역 6번 출구 앞이야.'

내가 먼저 와 기다리던 곳과 J가 서 있는 곳은 불과 2미터 거리도 안 된다. 그런데 J는 내가 있는 곳을 돌아볼 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먼저 도착해 있던 내가 J에게 다가간다.

빗속을 한참 걸어 어느 찻집에 마주 앉은 J와 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 없는 J. 멀리서 왔을 뿐인데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나.

이 순간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궁금한 게 많았다.

전화를 할 수도 문자를 할 수도 있었을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또 눌렀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렸다.

목소리와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며 확인하고 싶었다. 적당히 꾸민 진실을 닮은 사실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늑대들에게 나를 던져주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언제부터 나를 상대로 베프 놀이를 한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가 행복한지 궁금했다.


기다렸던 시간만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J는 나와 그녀에 대한 것보다 늑대들의 소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나는 말했다, "난 네 옆에 있었어,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런데 넌 한 번도 날 못 보더라. 마치 아까 약속 장소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날 못 보던 것처럼."

또 내가 말했다, "넌 지난 35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어. 내가 네 친구였으니까."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한마디 말도 못 하는 J를 보며 차라리 웃음이 나온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반년이 갑자기 허무하게 느껴진다.

지난 세월 둘도 없는 친구라고 여겼던 그녀 앞에 이렇게 이런 말들을 건네며 앉아있는 나 자신이 낯설다. 꿈이면 좋겠다.

"그럼 그동안 내 마음은 하나도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물컵을 쥔 손이 떨려 온다. 당장이라도 컵을 들어 안에 든 물을 그녀의 얼굴에 끼얹어 주고 싶다.

고개를 꺾고 땅으로 꺼질 듯 앉아있는 그녀를 두고 나는 그만 일어섰다. 컵을 너무 꽉 쥐고 있었는지 저린 손으로 우산도 챙기고 가방도 어깨에 둘렀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바깥은 시원했다. 우산 든 손목을 때리는 차가운 빗방울들이 목까지 꽉 찬 열기를 식혀주는 듯했다.

분노는 가슴을 마르게 한다. 분노의 불꽃은 모든 걸 사르고 부서진 재만 남긴다. 거기 어떻게 촉촉함이나 부드러움이 깃들 수 있을까.

30년 넘는 시간을 함께한 그녀에게서 빛과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 그 빛은 눈이 부실만큼 환했다. 이제 밝음을 잃은 빛 속에 검은 그림자만 남았다.

그림자의 주인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처음 보았던 환한 빛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생각날 때마다 괴로울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그 괴로움도 옅어질 날이 오겠지. 살면서 시간의 힘을 자주 빌리게 되지 않길 바랐는데.

가을비 내리는 인사동 골목 어귀로 지난 세월과의 긴 이별이 지나가고 있었다.


* 경험을 바탕으로 쓴 콩트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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