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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14. 2023

원주율

pi

오늘 친구를 하나 잃었다.

오래된 베갯속이 터져 안에 차 있던 곡식가루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걸 보는 것 같았다. 후드득, 그렇게 내 마음도 떨어져 내린다.

세월 속에 정리돼 가는 것 중 하나가 인간관계라고 하지만, 오랜 관계의 정리는 홀가분하지만은 않다. 단숨에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긴 시간 너와 나 사이 매달려 있던 줄이 어느새 점점 가늘어지다 그만 툭 끊어져버린다.

실은 무엇을 견디지 못한 걸까. 너와 나의 이기심, 욕심, 아니면 그냥 세월의 무게일까.

아무래도 기쁨보다는 슬픔이 늘어가는 게 나이 먹는 일인가 보다.

몸이 멀어도 마음은 가까울 수 있고, 마음이 멀어도 몸은 가까울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너와의 거리를 앓는다.


나도 모르고 살던 내 마음속 감정들을 하나씩 알아간다.

내가 그 친구에게 가졌던 마음은 기댐과 기대였다. 그와 나 사이의 일정한 거리 때문에 그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던 우리의 간격, 중심과 만나지 못하고 둘레가 돼버린 우리의 사이.

한 영혼의 속내에까지 이르고자 했던 내 마음은, 마치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래야 한다고 작정한 것 같던 내 영혼은 이제 다시 돌아와 내 안으로 숨는다.


있던 자리에 그대로인 건 이 세상에 없다. 모든 건 흘러간다. 그리고 달라져 간다.

그가 예전의 그일 수 없듯, 나도 예전의 나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만나는 시간은 찰나일지 모른다.

영겁을 바라고, 때론 순간이 영원이라고 착각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일뿐이다.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 영원을 바라는 건 인간으로 태어난 나의 버릴 수 없는 모순이다.

내 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용기는 욕심을 버릴 때 생긴다.


너와 내가 부른 찬란한 노래는 울림이 되고 너와 내가 춘 결 고운 춤은 그림자가 된다.

그리고 마음이 떠나간 자리에 차가운 계약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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