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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Nov 12. 2022

나의 영화들

"나는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해. 영화보다는 연극이 좋아."

20대부터 해 오던 말이다. 누가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먼저 이 말을 한 후 따라가곤 했다.

실제로 안 좋아하는 영화류가 있긴 하다. 시종일관 떠들썩하다 결말은 허무한 액션 영화, 선혈 낭자한 범죄나 잔인한 장면이 난무하는 영화, 줄거리가 뻔한 너무나 상업적인 영화, 영화제 상을 잔뜩 노린 속셈을 작품성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킨 영화들은 관심 밖이다.

나의 영화 취향을 굳이 말하라면 잔잔, 메시지 뚜렷, 그리고 영화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이 보너스 같은 영화가 좋다.


처음으로 극장에 가본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주말 어느 날 아빠 친구분 가족과 우리 가족은 함께 <메리 포핀스(Mary Poppins, 1964)>를 보러 갔다.

영화 속 안개 자욱한 이국적인 거리와 돌로 포장된 울퉁불퉁한 길에 떨어지던 빗줄기는 그날 이후 내 감성의 한 부분을 차지해 온 게 틀림없다.

하늘에서 우산을 타고 내려온 메리 포핀스, 그림 안으로 들어가 겪는 모험들, 공중에 뜬 채로 즐기는 티 타임, 성당 앞 계단에서 새 모이를 팔던 할머니, 묘기와도 같은 굴뚝 청소부들의 춤 등 어린 내 마음을 신비로운 상상으로 가득 채워 주던 장면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다 아빠가 사주신 풍선이 식당 천장에 둥둥 떠다니는 걸 보며 메리 포핀스의 우산을 떠올리던 기억도 난다.

혹시 잊어버릴까 봐 영화의 줄거리를 써놓기도 했던 걸 보면 그때도 지금처럼 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기억을 붙들고 싶은 소망이 있었던 것 같다.


사진 indiepost.co.kr


중학교에서는 학년 전체가 영화를 보러 가는 단체관람이 종종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거나, 교육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가 나오면 단체관람이 중요한 학교 행사가 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단체 관람한 영화가 <벤허(Ben-Hur, 1959)>였다. 감수성으로 마음이 온통 촉촉하던 사춘기 시절, 스크린을 가득 채우던 성서의 풍경과 배우들의 연기, 웅장한 음악에 그만 넋을 빼앗겨 버렸다.

그때부터 움튼 나의 영화 사랑은 배우들의 사진 모으기, 용돈 모아 영화 잡지 사기,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 엽서 보내기 등으로 이어졌다. 어느 하나 설레지 않은 건 없었다.


사진 slashfilm.com


<로미오와 줄리엣(Romeo & Juliet, 1968)>을 보고 나서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영문판으로 구해 외울 정도로 읽었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OST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라디오 카세트의 동시녹음 버튼을 눌러 녹음하고 테이프가 닳을 정도로 들었다. 그런 나를 위해 영화를 같이 보러 갔던 친구가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의 패널 사진을 생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사진도 음악도 구하기가 지금만큼 쉽지 않던 시절, 어렵게 구한 자료들은 책상 서랍 속에 모셔두고 보고 또 보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공부와 시험에 치어 숨 한번 시원하게 못 쉬던 그 시절 내게 영화 사랑은 작지 않은 위로였다.



스크린 오른쪽에 세로로 나오던 자막, 왕왕 울리던 배우들 말소리가 이따금씩 묵음이 되거나 실내 장면에서 무수한 빗줄기를 봐야 할 때도 있던 옛날 영화관이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구수한 간식 냄새 속에 모두 함께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뜨겁게 공감하던 그 분위기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와 비교도 안 되는 첨단 기술의 혜택 속에서 원하는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 요즘을 살아가면서도 옛날 영화들을 잊지 못하는 건, 그때 꿨던 꿈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문학 복수전공을 하던 시절엔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 문화원을 열심히 드나들며 그곳에서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들을 보곤 했다. 학과 공부를 위한 영화 관람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멋진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들어 영화와 만날 수 있을까 동경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곤 했다.

영화를 보며 내 글을 상상하던 마음은 작은 불씨로 계속 살아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해."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뭔가가 너무 좋을 때 반대로 말하고 싶은 심리일까.

영화 속에 녹아 있는 내 꿈을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서일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영화와 나의 밀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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