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큼이와 앙탈이

by Anna Lee

10박 11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J가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그러더니 겉옷과 바지까지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지기 시작한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 물음에 대답도 않고 한참을 뒤적거리던 그가 드디어 어딘가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내 내민다.

"하나 샀어요. 가져요." 바로 전까지 맹렬히 주머니를 뒤지던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박스 안에는 조그만 귀걸이가 들어있었다. 펼쳤다 접었다 할 수 있는 부채 모양의 귀걸이 었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중국과 일본을 돌아보는 연수 프로그램에 같은 과 후배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스무 명 남짓한 팀 멤버들은 사진을 찍거나 밥을 같이 먹으며 삼삼오오 어울려 다녔는데, 그중 한 명이 J였다.

그에게서 선물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같은 학년이면서도 그와 나는 멤버들 중 제일 안 친했고, 모두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도 그와 나만 서로 존댓말을 했다.

서울에 돌아와 팀 회식을 하네 같이 찍은 사진을 교환하네 모임을 거듭하다, 우리는 둘만의 데이트를 시작했다. 함께 영화를 보거나 오락실,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뚜벅이 사랑(자가용 없는 연인을 일컫던 말이다.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기동성이 떨어져 때로 불편했다)을 키우던 동갑내기였다.


연애 2년 만에, J는 제대 후 졸업을 3개월 앞두고 나는 복수전공으로 아직 학교에 머물며 결혼을 했다.

연애 시절부터 우리는 툭하면 싸웠다. 둘 다 고집이 장난 아니어서 양보도 자비도 없었다. 우리의 싸움에 지치다 못한 친구들이 "결혼만은... " 말릴 정도였다.

한 번은, 왜 싸웠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일로 도서관 광장 앞에서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다 홱 돌아서 가는 그를 향해 우산을 날렸다. 작은 접이식 우산이었고 그의 등에 있던 백팩을 향해 날린 거였는데, 높이 조절 오류로 그만 그의 뒤통수를 명중시키고 말았다. "아야!" 하며 매서운 눈으로 뒤돌아보던 그와 주변의 시선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학생회관이나 식당에 갈 때 괜히 눈을 깔고 다녔다.

결혼 피로연에서 J의 친구가 인사말 한답시고, "J가 여자 친구랑 싸우고 술에 떡이 돼서 우리 집 쳐들어와서는 라면 끓여달라고 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 결혼은 정말 경이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양쪽 친구들이 서로 재빠른 동의의 시선을 교환하던 게 잊히지 않는다.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의 아웅다웅은 계속되었다. 사소한 일 하나에도 의견이 맞는 적이 거의 없다. 외식 메뉴, 여행 가방 꾸리기부터 심지어 욕실 두루마리 휴지 걸어놓는 방향까지 성격과 라이프 스타일이 판이하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2년이나 연애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30년을 함께 산 건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둘 중의 하나인 나도 믿기지 않는다.

30년.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고 한다.

나는 J와 2년 데이트하고 30년을 부부로 살아왔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첫 아이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5년 후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부모님과 함께 산 시간을 그와 함께 한 세월이 훌쩍 뛰어넘었다.


연애 시절 언젠가 J가 내게 준 엽서에 '엉큼이와 앙탈이'라는 소년, 소녀가 있었다. 엽서 뒷장에 그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담에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서 널 행복하게 해 주겠지... 나는 누가 데리고 살지 큰일이야... '

그가 한 이 예언 아닌 예언이 맞은 건지 틀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기 행동과 말에 책임지는 사람, 진실을 고수하고 규칙을 존중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일부러 해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열대의 밤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구름 뒤에서 서서히 나타나 온 세상을 환히 비춰준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박미경 옮김 >

며칠 전 그가 내게 준 책의 한 구절이다.


그로 말하자면, 한결같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의 다툼은 계속된다.

둘이 한 곳을 바라보며 하는 다툼은 칼로 물 베기다.


IMG_0165.jpeg 그림 Yooyoung IG @yyoung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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