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물리적 의미로서의 나는 '나의 뇌'이고, 철학적 의미로서의 나는 '나의 기억'이라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요즘 들어 무언가가 기억나지 않을 때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나이 먹는 게 실감 나기도 하고, 망각과 노화를 나도 모르게 연결 짓고 있는 게 웃프기도 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기억 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이고 또 그만큼 잊어버릴 게 많은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버리면 될 텐데, 마치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내 안 어디에선가 초조함이 고개를 든다.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면 나는 어쩌면 더 이상 나일 수 없다는 공포심도 생겨난다.
당장 써먹어야 할 단어나 지식의 편린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살 만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절의 나에 대한 기억이다.
오늘 갑자기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오래된 CD를 틀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 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 시절 내게 소중한 친구였던 S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엘비스를 좋아했었고, 직접 녹음한 그의 노래 테이프를 내게 선물했었다. 나는 그 테이프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음악과 함께 그 시절의 기억들이 나의 오감을 거쳐 생생해지기 시작했다. 어리고 감수성 예민했던, 그래서 도전적이고 용감했던 그때의 우리들... 그 감미로움에 취하여 나는 요즘의 답답한 상황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음악의 위대함이다. 음악만 있다면 타임머신 없이도 가고 싶은 시절로 얼마든지 되돌아가 그때의 나를 느낄 수 있다.
지나온 시절의 "나"들이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나"도 있다. 그 안 좋은 느낌의 "나"들이 지금의 삶을 때로 힘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미워했던 "나"도 사랑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게 있다면 추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안 좋았던 기억들 조차 희미해지거나 절반 정도의 이해로 견딜 수 있어지는 걸 보면, 지금까지의 추억을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멀리 있어서 서로 만날 수 없을 때 추억이 더 소중해진다.
오늘 밤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꿈으로 꾸고 싶다.
외가 마당에서 뛰놀던 꿈을 꾸고 싶다.
나를 무한대로 사랑해 주셨던 외할머니가 계시던 햇빛 환한 봄날의 마당에서 마음껏 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