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김지수 기자가 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다.
지난가을 글벗 유달리 작가님(https://brunch.co.kr/@especially)이 추천해 준 책을 이제야 읽게 됐다.
학자이자 교육자,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마지막 인터뷰가 글로 태어난 책이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어떤 타이틀보다, 나는 죽음을 앞둔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여섯 살 무렵, 나는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너무 강렬해서 한동안 어린 나의 심장을 꽉 그러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호기심이 불러온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약하게 태어난 탓에 주위 어른들의 불안감이 고스란히 내게 옮겨왔기 때문일까.
밥을 먹다가도 친구와 놀다가도, 문득 곧 죽을 건데 이런 게 무슨 소용일까 힘이 빠졌다. 가족과 머잖아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내가 그토록 가깝게 느꼈던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한 감정이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살아났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대화가 멈추는 순간, 정적을 느끼는 찰나, 운동회 날의 조용한 교실 같은 침묵의 시간, 그것이 죽음의 이미지라고 그는 말했다.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라고도 말했다.
생의 클라이맥스가 죽음이라 말함으로써, 어쩌면 그는 생명의 고귀함을 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죽음을 말하는 것은 결국 생을 말하기 위함이다.
생명, 살아있는 것, 그게 이 세상이라네. 눈물 나는 세상이라네.
'엄마 없다? 엄마 있네!' 까꿍놀이가 우리 인생의 전부이고, 결국 문학이자 종교라는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생후 4개월부터 돌 전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가 '까꿍놀이'다. 얼굴을 가렸다 보여주며 "까꿍!" 하거나 가까운 데 잠깐 몸을 숨겼다 나타나며 "까꿍!" 해도 아기들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매우 즐거워한다. 이는 대상영속성 개념을 활용한 놀이다.
대상영속성은 사람이나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계속 존재함을 말하며, 생후 2세 정도에 이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대상영속성을 이해함으로써, 아이들은 분리불안에서 벗어나 부모와 건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엄마가 없는 쪽에 힘을 싣느냐, 있는 쪽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인생이 해피 엔딩으로 혹은 영원한 헤어짐으로 갈린다고 말했다.
엄마가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 아이들은 무엇을 느낄까. "까꿍!" 소리와 엄마의 재미있는 표정이 아이들을 웃게도 하지만, 아이들이 웃는 진짜 이유는 엄마가 보이는 순간의 행복감, 안전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사람이 나의 감각 안에 들어올 때, 그보다 더 안심되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내 편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살아갈 욕구가 충만해지는 건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말했다.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삶은 그렇게 천천히 다가오다 어느 순간 멀어져 간다.
딸의 죽음 앞에 그가 가장 아쉬웠던 건, 살아있을 그때 못한 말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관계, 마음이기에 하지 못한 말이 아픔으로 남는가 보다.
나보다 먼저 살다 떠난 그는 이 책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빛나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탐욕이나 미련이 아닌, 생에 대한 동경이며 사랑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잠시 나에게서 떼내어 바라보기 ⎯ 그 고독한 시간이 이 책을 통해 가능했다.
그리고 비로소 삶에의 내 뜨거운 사랑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스승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모래집을 짓는 아이처럼 보였다. 매번 실패할 수 있기에 이 놀이가 끝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아이. 막막한 울분이 아니라 가벼운 흥분에 휩싸인 채로.
✳︎ 귀한 책을 추천해 주신 유달리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