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팅힐(Notting Hill)>을 보고
<노팅힐(Notting Hill; 1999)>을 보았다. 웬일인지 그동안 볼 기회가 없었던 영화다.
영화는 런던 노팅힐 거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파는 노점들, 타투하는 곳, 미용실, 골동품 가게, 셰프로 전업한 건축가 이야기, 그리고 윌리엄 집의 파란 대문까지 모두 정겨운 모습이었다. 윌리엄의 내레이션만으로도 그가 이 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시카고를 좋아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왜 뉴욕을 좋아하게 됐는지 문득 깨달았다. 시카고가 내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차가운 도시였다면, 지금 사는 동네는 사람들의 따스한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윌리엄에게 찾아온 특별한 만남이 내게도 일어났으면, 가슴이 뛰었다.
어느 날 윌리엄이 운영하는 여행서적 책방에 유명한 미국 배우 애나 스콧이 나타난다.
그리고 몇 분 후 길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은 윌리엄이 실수로 쏟은 주스로 인해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한다.
애나를 찾아간 호텔에서 기자로 오인된 윌리엄은 뜬금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갑자기 찾아온 그녀의 남자친구 때문에 호텔 종업원인 척하기도 한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누는 사랑은 윌리엄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달콤하다.
그의 동생 허니의 생일파티에 함께한 애나와 윌리엄의 친구들 ⎯ 그들은 유명인인 애나를 눈앞에서 볼 수 있음에 신기해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와 달리 소박한 그녀의 모습에 매료되어 이내 속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의 따뜻한 식탁이 잊히지 않는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벽은 오직 진심으로 허물어뜨릴 수 있는 것 같다.
애나는 한 남자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한 여자로서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만, 둘의 사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는 윌리엄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러나,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은 윌리엄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애나의 기자회견 장소를 찾아간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이제까지와는 달리 행복하게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둘의 모습과 함께,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의 노래 'She'가 흐른다. 실제로 일어날 확률이 극히 낮은 허구다운 허구,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 감미로운 해피엔딩의 노래였다.
애나가 윌리엄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날 아침, 집 앞에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며 나눈 두 사람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생각의 극명한 차이, 그리고 애나가 윌리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일어난 일은 내일이면 신문과 함께 쓰레기통에 들어갈 일일 뿐이라고 말하는 윌리엄에게 애나는 그렇지 않다고, 오늘 일은 기록으로 남아 자신이 언급될 때마다 지금 찍힌 사진들이 파헤쳐질 거고 자신은 오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세상은 느릿느릿이라도 변한다. 세상에 몸 담은 사람들의 생각도 바뀐다.
그녀 말대로 기록은 남지만, 시간이 흐르면 기록에 대한 견해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오래전 나의 기록만 다시 보더라도 그때와 달라진 내 눈과 생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흘러갈 일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124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속에 사랑, 우정, 예술, 유머, 철학 모두를 성공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고전은 늘 살아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영화 첫머리의 밝고 따뜻한 풍경만큼이나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였다. 애써 행복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지는 영화다.
클리셰,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대' 결말을 굳게 믿고 싶은 영화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rZDNlELz-W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