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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11. 2023

머무름과 나

<정체>를 읽고

브런치스토리를 한 달 쉬는 동안 임태희 작가의 <정체(2013)>를 읽었다. 임태희 작가는 브런치스토리에서 활동 중인 '그 밖의 나' 작가다.

그녀의 책 <쥐를 잡자(2007)>를 읽고 나니 <정체>도 읽고 싶어졌다.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린 내가 <쥐를 잡자>를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으니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웬일인지 편린으로만 남아있던 고등학교 시절 이후의 기억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와글와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 책의 이야기 곳곳에서 마치 잃어버렸던 나머지 조각들을 찾은 듯 맥락이 생겨났다.

'낙원'을 읽고는 고등학교 때 친구 S와 길을 헤매 다닌 생각이 났다.

토요일 반나절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한강변으로 달려가곤 했다. 한강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친구가 된 후로 우리는 자주 한강을 보러 갔다. 야경을 더 좋아하긴 했지만, 토요일 오후의 고즈넉한 강의 모습도 사뭇 좋았다.


'미아'를 읽고는 S와 편지를 주고받던 일이 생각났다.

하루종일 붙어있던 것도 모자라 서로의 책상서랍 안에 편지를 넣어두곤 했다. 혼자 쓰던 일기보다도 희로애락이 더 많았을 우리의 편지. 이제는 읽을 수 없지만 기억 어딘가 깊숙이 자리하며 지금의 나를 만들었겠지.


'승화'를 읽고는 가슴이 후련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얼음땡 놀이 속 얼음이 돼있던 내게 누군가 '땡!'하고 말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하여 아득한 고3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수많은 느낌들, 입시생이란 이유로 그리고 대학 입시를 통과했단 이유로 그냥 넘기고 묻어두었던 감정들, 그 뚜껑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마치 물을 만난 드라이아이스가 안개로 승화하듯, 나를 제한하던 것들이 모두 날아가는 홀가분함을 이제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정체'를 읽기 시작하자, 흐르던 추억이 주춤거리던 몸짓을 멈췄다.

제목을 처음 본 순간에는 정체를 '정체(Identity)'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읽어 가며 머무름이란 뜻도 있음을 깨달았다.

멈춤, 머무름,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주인공의 모습이 대학에 갓입학했던 시절의 내 모습과 겹쳤다. 입시에서 풀려나 품에 안게 된 자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부터 할까 갈피도 잡기 전에 밀려든 수많은 선택의 강요, 연애의 압박, 참혹한 시국 앞에 현기증이 일듯 잃어가던 내 모습.

고삐 풀린 망아지는 이상하게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갑자기 드넓어진 세상 앞에서 그때까지 있던 자리도, 앞으로 있어야 할 자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출구 끝에 올라섰을 때 갑자기 두려워졌다. 뒤를 돌아보면 아주머니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을 것만 같았다. (p.92)
... 아무리 조심해도 공포스러운 상상이 찔끔찔끔 넘쳐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만일 내가 찾는 아이가 이곳에 없으면 어떡하지? (p.99)


주인공은 터널에서 노인을 만나고 나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표정을, 웃음을, 거울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학교 앞 문구점과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일상과 우연이 섞인 여정은 주인공이 자신의 실존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그의 깊어감을 나는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폭우'에서 던져진 질문, "넌 누구니?"는 '정체'에서 가까스로 알게 된 내 존재에 대한 확장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알아낸 나의 실체, 거기서 더 나아가 나의 실존을 확인하고픈 집요함이었다. 그 선명한 질문이 다시금 나를 깨어나게 했다, "넌 누구니?"

그리고 주인공과 '그녀'가 꼭 잡은 손의 온도만큼 내 몸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 책의 다섯 개 이야기에서 만난 십 대 끄트머리에 선 그들에게서, 나는 추억과 함께 진한 공감을 느꼈다. 책을 읽으며 이토록 캐릭터들에 몰두해 본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책을 읽다 말고 책 속에 얼굴을 묻어보았다. 추억의 냄새가 날 것 같아서였다. 책이라는 물리적 존재에서 공감각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희열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즐거움일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이 지닌 뛰어난 힘이라고 생각했다.

꽃향 가득한 봄날 친구의 속살거림 같기도, 여름밤 설핏 든 잠에서 꾼 꿈같기도 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빠져나오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아니, 거기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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