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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9. 2023

회상

김성호의 <회상>을 듣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날 때도 있구나, 그때의 감정이 뭔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물샘이 먼저 반응할 수도 있구나 알게 된 순간이었다.

동영상 속 한 노신사의 모습 ⎯ 희끗희끗한 머리, 단정한 안경과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회상에 잠기듯 노래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작곡가로서 주옥같은 노래들을 만들면서도 가수로서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던 김성호, 그였다.

젊지 않은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회상>을 처음 들은 건 대학 시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친구들과 찾아간 동아리. 몇 군데 더 돌아다녀보고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맨 처음 간 여론조사 동아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새내기가 왔다고 흥분한 선배들이 초면에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며 극진히 들인 공에 넘어간 것이다. 단,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동아리 성격상 위험이 따를 수 있다고 선배들은 솔직하게 말해줬다. 그것도 맘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동아리 활동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매주 열리던 총회는 동아리방을 꽉 채운 열기로 뜨겁고 시끌벅적했다.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대학에 온 건지 여고 생활의 연장인지 헷갈리던 우리 과를 잠시 탈출해, 여러 과가 함께 어울리는 분위기를 즐겼다.

공강시간마다 동아리방에 들러 통기타 치는 선배들 끌어내 밥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건 우리 새내기의 특권 같은 거였다. 설문조사가 힘들었던 날은 저녁에 술도 한 잔씩 나누며 좁은 식당이 터져라 고래고래 노래도 불렀다.

강촌으로 떠났던 MT, 새벽녘 어둔 강가에 피어오르던 물안개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MT의 묘미는 혼숙이지, 크크" 하던 선배언니는 소원대로 자신이 짝사랑하던 선배오빠 옆에 살그머니 누워 한 이불을 덮고 잤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이 없던 나는 먼저 잠든 친구들 가운데로 파고들어 두 친구를 철벽 삼아 잠을 잤다.


시간이 흘러 내게도 후배들이 생기던 무렵, 한 아이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키는 멀대같이 큰데 소년 같은 이미지를 가진 H였다. 말 끝에 입술을 빠는 버릇이 있어 더 소년 같았다.

동기였던 H와 나는 늦게까지 남아 함께 일할 때가 많았다. 그날도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가다 내가 먼저 내리게 됐다. 역에 가까워져 지하철이 속도를 줄일 때쯤 H가 "잠깐만" 하더니 내 입술 끄트머리에 붙어있던 머리카락 하나를 떼어 제자리로 갖다 줬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지하철이 멈추고 나는 그냥 내려버렸다. 지하철 역을 벗어나 집까지 걸어오며 가슴이 콩콩 빨리 뛰고 아까 H의 손가락이 닿던 자리가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얼얼했다. 집에 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가서는 거울로 얼굴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뭐지?"

뭐긴 뭐야, 그때부터 본격적인 짝사랑이 시작된 거였다.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H랑 밥을 먹기 위해 동아리방을 자주 기웃대고, 괜히 건수를 만들어 영화도 같이 보러 갔다. 그러면서 아무리 관찰을 해도 H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고백을 하기로 결심하고는 분위기 좋은 학교 앞 카페에서 H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날, 나는 보기 좋게 바람을 맞았다. 한 시간을 기다리다 힘없이 집에 온 저녁, H에게선 어찌 된 일인지 전화도 없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을 거라 굳게 믿으며 스스로 위로를 했다.

다음날도 동아리방에서 H를 볼 수 없었다. 마침 H랑 친한 선배를 만나 H의 전날 행방을 물었다. "H? 어제 나랑 지하철 타고 집에 같이 갔는데, 왜?"

선배의 말로 미루어 보아 H는 일주일 전쯤 한 나와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기, 오빠, H 만나거든 착하게 좀 살라고 전해주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선배를 뒤로 하고 나온 후, 나는 꽤 오래 동아리방에 가지 않았다. 시험과 팀 프로젝트로 바쁘기도 했지만, 고백 후 거절도 아니고 아예 고백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게 허탈하고 창피했다. 그렇다고 H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기도 싫었다.

그렇게 바람맞고 무안하고 삐지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두어 달을 보내고 나서, H가 같은 과 친구랑 사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H한테 바람맞고 학교 앞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다 들은 노래가 김성호의 <회상>이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레코드 가게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좋아하는 아이한테 고백하려던 날 바람을 맞은 내 상황이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완벽한 OST였다.

그 후로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날이 생각나곤 한다.

일상다반사 작가님의 글을 통해 이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타임머신이 뭐 별 건가, 바로 음악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그녀는 조그만 손을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눈을 보았지
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어.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멀어져 가는 뒷모습 보면서 두려움도 느꼈지
나는 가슴 아팠어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한 두 번 원망도 했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하지만 꼭 그렇진 않아. 너무 내 맘을 아프게 했지
서로 말없이 걷기도 했지만 좋은 기억이었어
너무 아쉬웠었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김성호의 회상> 중에서.


웬일인지 동아리 시절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사진이 있었다면 나는 더 일찍 H를 기억해 냈을까.

결혼을 한 달 앞두고 H와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나 함께 차를 마셨었다. 군대 갔다 와 살집이 좀 붙은 걸 빼면 예전이랑 똑같았다. 말 끝에 입술을 빠는 버릇도 여전했다. 그에게 하지 못한 고백이 사라진 자리에, 젊은 날의 추억과 결혼축하가 남았다.

지금은 그도 이 노래를 부르는 멋진 노신사처럼 그렇게 나이 들어 있겠지.

흐르는 세월에, 우리의 어린 날들에, 가슴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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