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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May 15. 2023

나의 실습일지

대학에서 아동학을 공부했다. 내가 원했던 전공은 아니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글쓰기와 담을 쌓아버렸던 대학시절 전까지 내 꿈은 작가였다.

결정적인 순간의 엉뚱한 선택은 '시험점수와 아빠' 효과였다.

선시험 후지원의 입시제도 시절, 뒤늦은 방황 끝에 얻은 내 점수는 문과대에 지원하기엔 부족했다. 어쭙잖은 글쟁이가 되느니,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훨씬 나은 미래를 보장할 거라는 아빠의 설득은 주장을 넘어 으름장으로 흘렀다. 결국, 나는 재수 대신 아동학을 선택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세계로 나 자신을 던진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날, 학과 건물 벽에 줄줄이 걸려있던 어린아이들 사진이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만난 친구들과 지금까지 30년 넘는 우정을 공유하고 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아니긴 했지만, 대학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1학년 때 가입한 여론조사 동아리에서 설문지를 돌리고 통계분석을 배웠으며, 미팅 소개팅 안 가리고 나갔고, 축제와 행사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2학년과 3학년 때 시립아동보소와 유치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생소하던 유아교육 이론들이 실전과 맞물려 나날이 생생해졌다.


3학년 때 우리 학과 부속 유치원에서 하게 된 실습은 4학년 교생실습 전 예방주사 같았다. 관찰, 보조교사, 소그룹 지도와 대그룹 리드 등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다.

서툰 실습생인 우리들은 곱디고운 이론과는 너무 다른 현장에서 진땀을 빼기 일쑤였다. 실습이 끝나고 교실에서 벗어나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거나, 우는 친구도 있었다. 아이들은 예측할 수 없었고, 대부분이 과 선배인 교사들은 엄하고 단호했다. 교실 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점수매김의 대상이기도 했다.

제일 어려웠던 건 자유놀이 시간에 아이들을 놀이로 초대하는 일이었다. 흥미 있는 활동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아이를 지도하기는 쉽지 않았다.

유난히 교실 안 떠돌이가 많던 어느 날, 한 선생님이 친구 S에게 다가와 아이들을 활동으로 유도해 보라고 했다. S는 아이들을 모아 '독수리 오형제' 놀이를 하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설득을 해도 다섯 번째 아이가 오지 않더란다. 당황한 S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너네만 출동하라!"

S의 말에 박장대소를 한 우리. 그날부터 S의 별명은 '너네만  출동하라'가 되었다. '너네만  출동하라' 친구는 훗날 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재학원을 20년이나 운영했다.


몇 주 전 이삿짐을 정리하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 해 실습일지.

아이들을 관찰하며 얻은 인상 깊은 장면들, 이론과의 연계, 아이들 하나하나를 존중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처음 해본 자료제작과 활동지도에 대한 소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실습일지를 통해 그때의 나를 만난 듯했다. 대학 3학년의 내가 지금의 내게 말했다.

"공부하기 싫고 교실에 들어가기 두려울 때 후회를 했어, 아빠 말씀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말이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선택을 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더라고. 그래서 투덜대지 않기로 했어. 이 길이 숨겨져 있던 진짜 내 길인지도 모르잖아."

그 후 뒤늦게 발견한 나의 길은 감미롭고 벅찼다.


지금의 내가 대답했다.

"선택의 순간에 소극적이었던 너를 이해해. 숨겨진 길을 더듬거리며 헤매기도,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걷기를 멈추진 마. 길을 잘못 들면 되돌아가려 하지 말고 앞으로 가. 세상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는 걸 잊지 마.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게 바로 그 증거야."

그 시절 꿈과 땀이 스민 나의 실습일지처럼, 지금 내가 쓰는 글들도 훗날 나와 이야기해 줄까.

나 자신을 사랑하며 꿈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미래의 나를 만날 수 있겠지.



✳︎ 휴가를 다녀오려 합니다.

   여행과 독서를 통해 맑고 깊어진 마음으로 한 달 후 오겠습니다.

   건강하게 지내다 다시 만나기로 해요.

   보고 싶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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