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Lee Aug 15. 2023

공감천사

You Read My Mind

20여 년 전 어느 날이었다.

한껏 뚱뚱해진 배를 무더위에 힘겹게 끌어안고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

"2 cm 정도 문이 열렸네요. 당장 입원하셔야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나는 빈 몸 그대로 입원을 했다. 나중에 남편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겨 달려왔다.

그러나 곧 만나게 될 줄 알았던 아기는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가, 입원 사흘째 되던 날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내 품에 안겼다.

웬일인지 나는 날씨 좋을 때 아기를 낳아본 적이 없다. 첫째는 한겨울에, 둘째는 한여름에 낳았으니 말이다. 더위와 싸워가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건지 줄줄 흐르는 내 땀을 먹이는 건지 구분하기 힘든 날들이 흘렀다. 둘째를 생각하면 몇 장면들이 마치 하이라이트처럼 떠오른다.


첫 소아과 정기검진에서 아기의 다리 주름이 양쪽 비대칭이니 잘 지켜봐야 한다는 걱정스러운 말을 들었다. 아기의 허벅지 주름이 비대칭일 경우 고관절 탈구가 의심되며, 걷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머리카락이 솜털처럼 부숭부숭 몇 가닥 없어 제 언니 친구들이 '대머리 빵꾸'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다행히 별 일 없이 잘 자란 대머리 빵꾸는 지금은 건강한 긴 머리 숙녀가 되었다.

신중하고 말 수 적은 첫째와 달리 둘째는 엉뚱하고 수다스러웠다. 기어 다닐 때부터 냉장고 앞에 앉아 먹을 걸 내놓으라고 욕심을 부리는가 하면, 조금 더 자라서는 색종이 오리는 가위로 자신의 앞머리를 오려 놓거나 옷에다 예술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첫째와 나누기 싫은 장난감을 여기저기 감춰놓다가, 장난감 나무망치가 첫째의 수영 가방에서 나온 적도 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우리 집에선 둘째가 그 무서운 '처키'로 통했었다.

어린아이가 어찌나 말 수가 많은지 단둘이 있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둘째의 끊임없는 질문 홍수에 엄마인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니까.

같은 엄마 아빠에게서 생겨난 아이들이 성격과 생김새까지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아이를 키우며 느낀 생명의 신비였다.


첫째와 둘째가 처음 만나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생아실 옆 모유 수유실에 첫째가 새로 태어난 동생을 보러 들어왔다. 마침 아무도 없을 때라, 아이의 난입을 간호사님이 눈 감아 주신 듯했다. 그때 둘째를 바라보던 첫째의 경이로움이 담긴 따뜻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아이에게서도 이런 눈을 볼 수 있구나 처음 알았다.

둘째가 아직 네 살이 채 안 됐을 때 낯선 나라에 왔다. 프리스쿨에 가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교실에 떼어놓고 뒤돌아 나오며 눈물을 삼키던 일, 한 달 후 발표회에서 다른 아이들은 큰 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그 말 많던 아이가 입 한번 벙긋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일... 돌아보면 그리 오래된 일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둘째는 우리 가족 중 공감능력이 가장 뛰어나다. 슬픈 뉴스나 영화를 보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눈물을 줄줄 흘린다. 고등학교 때부터 캠페인이나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린 외모 안에 숨겨진 단단함이 느껴졌다.

남편이나 첫째는 미처 모르는 내 마음을 기막히게 잘 읽어낼 때도 많다.

그런데 둘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친한 사람이 자신과 같은 느낌을 가져줬으면 한다. 맛있는 게 있으면 같이 먹어주고 ⎯ 이왕이면 맛있다고 감탄해 주면 더 좋고 ⎯ 좋은 영화는 자신은 몇 번을 다시 보더라도 같이 봐주길 원한다. 좋아하는 노래도 꼭 한 번은 같이 들어줘야 한다.


지난주에 함께 서점에 갔다가 둘째에게서 책을 일곱 권이나 추천받았다. 자기가 읽어보니 다 좋더라, 엄마도 꼭 읽어보라는 거였다. 일곱 권을, 그것도 영어로 쓰인 책을.

나는 바보 같이 고개를 끄떡이고 책을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읽다 보니 그중 한 권은 이민 1.5세대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라 나보다는 첫째가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집에 들른 둘째에게 이 책을 건너뛰는 이유를 설명하며, 가져가 첫째에게 전해 주라고 했다. 아이가 혹시 서운할까 봐 나도 모르게 설명이 장황해졌다.

"뭘 그렇게 진땀을 빼. 그냥 나중에 읽으면 되지." 둘째가 가고 나서 남편이 말했다. 내 모습이 코미디 같았다는 남편에게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모르는 소리. 내가 읽었나 안 읽었나 책 내용에 대해 물어본다구. 차라리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아."

내겐 아직 그녀가 숙제로 내준 여섯 권의 책이 남아있다. 올해 안에 다 읽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둘째가 다시 아기가 되는 상상을 가끔 한다. 지금은 길어진 다리와 팔 때문에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 대신 그녀의 마음이 내 마음에 쏙 들어오니 괜찮다.

지난 화요일은 둘째의 생일이었다. 그녀의 엄마일 수 있어 늘 고맙다.



• 사진: The Toyark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