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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ug 08. 2023

지금, 여기

Here and Now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 다닐 땐 언제나 책상 위에 두 가지 이상의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고, 회사 다닐 때도 몇 가지 일이 한꺼번에 컴퓨터와 테이블을 차지했었다.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땐 육아 말고도 몰두했던 다른 일들이 있었다. 아기 잘 때 같이 자 둬야 몸 상하지 않는다는 어른들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늘 잠이 부족했고, 스트레스에 절여진 몸과 마음은 물렁물렁해서 외상에 취약했다.

뿐만 아니라, 둘째를 낳기 전까지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 공부와 일, 일과 공부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한 일들인데, 버겁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보거나 하던 일을 멈추면 이내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생긴 지독한 감정에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일 때문에 힘든 게 낫다고 생각했다.


첫째를 낳고 산후 우울감을 심하게 겪었다.

아이와 나의 인생을 맞바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란 존재는 별로 해놓은 것도 없이 이대로 점점 사그라지다 어느 순간 푹 꺼져버릴 것 같았다.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으면 내 몸이 점점 투명해져 보이지 않게 될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를 빠져나온 불안감은 보다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몇 년 전 성경연구 단체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였다.

나와 한 반을 맡아 같이 일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이 ADD(Attention Dificit Disorder; 주의력 결핍증)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요? 어릴 때 진단받았어요?"

"응, 가족력도 있어."

"... 나도 집중 잘 못하고 산만한데."

"궁금하면 우선 인터넷에서 자가 테스트 한번 해봐요. 그나저나 우리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둘 다 산만하니 이를 어째. 하하."

"그러게요. 하하."

그날 집에 와 그녀의 말대로 해본 테스트 결과, 성인 ADHD(Attention Di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충격이었다.

미팅 시간에 늦거나 수업자료를 집에 두고 온 몇 번을 빼고는 그녀와의 수업은 다행히 잘 진행됐다. 슈퍼바이저의 빈틈없는 대처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배는 산에 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후 나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고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인풋(input) 작업, 즉 읽거나 들을 때 집중 시간이 짧은 것 같았다. 혼자 딴생각을 하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맥락을 놓쳐 낭패를 볼 때도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혼신을 다하기도 하고, 하던 일을 채 끝내지 않고 다른 일을 시작할 때도 많았다. 게다가, 동료의 부탁도 웬만하면 들어주는 편이라 언제나 할 일이 쌓였다. 마음은 급해지고 그럴수록 집중은 더 안 됐다.

어쩌면 나는 멀티태스킹이란 명목 뒤에 숨어 여기저기 도망 다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싫증이 나거나 마무리에 자신이 없어지면 바로 다른 일로 갈아타곤 했으니까. 그렇게 도망 다니다 보면 상황은 어떻게든 정리되기 마련이었다.

이 일 저 일 왔다 갔다 하다가 마감 직전에 겨우 마치곤 하는 일이 반복되자 번아웃도 자주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여러 가지 일을 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 자신은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도망 다니거나 숨을 수는 없었다. 내게 끊임없이 따라붙는 모호한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비겁해서도, 나 자신을 힘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다짐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락다운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생활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생활반경이 좁아지니 오히려 주변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과 함께 나 자신을 돌아보고 보살피는 시간이 늘어났다. 무심코 이어오던 습관들을 깨닫고 그들이 생겨난 이유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티태스킹이랑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이젠 테이블 위에 여러 가지를 펼쳐놓지 않는다. 꼭 해야 할 일만 리스트를 만들어 한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려 한다. 나 자신을 스스로 들볶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끊임없이 앞만 보고 뛰게 만드는 게 불안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지금도 불안할 때가 많다. 나도 모르게, 지금을 건너뛰고 그다음을 보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을 즐기지 않으면 앞으로 무엇이 온다 해도 내 존재의 온전함을 누릴 수 없다는 것, 지금을 텅 빈 채로 놔두고 앞으로 가본들 거기도 여기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불안은 불청객이다.

그러나 파티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불청객을 내쫓지 않고도 파티를 멋지게 만드는 것, 주최자의 몫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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