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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Sep 11. 2023

헛소리의 미학

말이 헛나올 때가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말실수는 억압된 무의식이 의식에 개입해 감추고 싶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실수 행위에서는 오래전부터 억압되어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그 때문에 화자에 의해 즉각적으로 거부될 수 있는 어떤 경향이 표출된다는 것을 가정해 보려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의미와 의도를 가진 정신적인 행위라는 것과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도의 간섭을 통해 발생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중 하나는 다른 의도를 방해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억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정신분석 강의(1997, 프로이트 저, 임홍빈 등 역) 중에서>

그렇다면!


나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나 자신을 가리켜 "언니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어처구니없고 창피해서 아이들이 뭐라 하기 전에 빛의 속도로 덧입혔다, "언니가... 아니, 엄마가..."

결혼하고 얼마 안 돼 남편이 신입사원 연수원에 들어갔다. 갓새댁 시절 남편 없이 시부모님과 한 집에서 지내게 됐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를 때였고 결혼은 처음이라 낯설고 이상한데, 남편 뺀 시댁은 쿠션 하나 없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님은 "얘, 요즘 애들은 시금치도 안 먹는다며?" 같은 뜬금없는 말씀을 툭 던지시곤 했다. "네?"

시가를 좋아하지 않아 '시'자 들어간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 줄 나중에 알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셈이 됐다.

거북하고 어색한 걸 억지로 누르며 친한 척 괜찮은 척 하루하루 살아가던 어느 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 어머니를 향해 튀어나왔다. "엄마."

말한 나도 화들짝, 들은 어머니도 깜짝 놀라셨다. 그런데 그 후에도 나는 같은 짓을 저질렀다. 시어머니를 몇 번이나 엄마라고 부른 것이다. "엄마... 아니, 어머니."

말실수가 억눌린 욕망의 표출이라고? 어머니를 엄마처럼 느낀 적도, 더욱이 그분을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적도 없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누군가와 통화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 계신 방 문이 열려있어, 전화기 너머에 시이모님이 계신 걸 알게 됐다. "... 응, 잘 지내요, 언니. 근데 며늘아기가 나보고 자꾸 엄마라고 부르네. 호호, 나도 몰라, 호호..."

아들만 셋을 키우신 어머니, 폐백 때 밤 대추를 던져주며 "넌 딸 낳아라" 하시던 어머니, 아들 또래 여자아이가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니 좋으셨던가 보다. 생각지 못한 말실수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 됐다.


정말, 숨어있던 이드(id)가 뛰쳐나오는 게 말실수일까?

그보다는, 다 자라지 못한 마음속 어린 내가 문득문득 자신을 드러냈던 건 아닐까.

어릴 때부터 자매가 너무 갖고 싶던 마음이 언니라는 말이 되어 나왔을까.

어릴 적 부모님과 살던 집이 그리워 엄마라는 말로 스스로를 토닥여 주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게 나다.

알아갈수록 재미있는 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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