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세상은 온통 검은색이다.
드글드글한 생각이 글자가 되지 않을 땐 머릿속에 손을 쑥 집어넣어 그 생각들을 끄집어낸 다음 눈앞에 펼쳐놓는 상상을 한다.
간혹 섣부른 생각이 알량한 단어가 되어 모니터에 턱 나와있는 게 꼴 보기 싫을 때도 있다.
그럴 바엔 아예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하얀 머릿속이 차라리 덜 괴로울지도 모른다.
뭔가 생각이 날랑 말랑하면서 영 안 떠오를 땐 또 어떻고.
혼자 슬며시 약이 오른다.
울다 웃다, 이런 나를 누군가 옆에서 본다면 큰 웃음 얻겠지.
오늘도 그랬다.
나는 글의 첫머리를 종이와 펜으로 시작하는 편이다.
랩탑에 글을 쓰다 막히면 나도 모르게 자꾸 앞부분을 고치고 있었다. 그러면 글이 꼬이거나 자기 검열이 늘었다. 글쓰기의 재미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종이에 끄적여 보니 생각과 손의 호흡이 괜찮았다. 모니터에서보다 글이 술술 써졌다. 그때부터 거의 모든 글의 첫 단락은 종이에서 시작한다.
프린터에 쓰고 남은 이면지를 이용하곤 하는데, 줄 있는 노트에서보다 뛰놀기가 훨씬 자유롭다.
벌써 며칠째 글 하나가 풀리지 않고 있다. 말할 때 혀가 꼬이듯 글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몇 시간을 끙끙대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왜 이렇게 생각이 복잡하지.
난 왜 이렇게 재주가 없지.
난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답답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순간, 엉뚱하게도 쓰던 종이를 와락 구겨 홱 던지며 외쳤다.
"당신이 창작의 고통을 알아? 난 춤추고 싶다구!"
때마침 랩탑에선 1920년대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뇌는 글쓰기를 때려치우고 스윙댄스의 스텝이라도 밟고 싶었을까.
그 꼴을 본 남편의 5분쯤 계속된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왠지 속은 후련했다. 뭔가 대단한 퍼포먼스라도 한 기분이었다.
생각 뭉텅이가 제 언어를 찾아 하얀 공간을 채워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엉킨 실타래 같은 말들이 질서 정연하게 술술 나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체 모를 감정이 제 이름을 찾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처럼 글에도 색을 입힐 수 있다면 좋겠다.
색색으로 칠한 도화지 위에 검은색 크레파스로 까맣게 덧칠을 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온통 까매진 도화지를 흡족스럽게 바라보며 검댕 묻은 손가락들을 툭툭 털고 나서, 작은 조각칼로 쓱쓱 그림을 그리면 드러나던 갖가지 색깔들.
비 온 뒤 구름 사이로 서서히 나타나는 밝은 해 같은, 검은색 밑에서 드러나던 예쁜 색깔들 같은, 그런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