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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20. 2022

나와 마주하는 시간

꿈을 꾸었다.

20대의 내가 어떤 사찰 - 성당 같기도 했다. 불상이나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 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 둘러본 후에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돼 있었다.

아무도 내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나는 왠지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속의 나는 20대였지만 이미 내 삶에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 삶이 허무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는 게 나을 거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제 다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안타까웠다.

승복을 입은 한 여자 스님에게 울면서, "저는 여기서 평생 살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후회하면 어떡하죠? 여길 떠나고 싶어질까 봐 겁이 나요" 하고 말했다.

스님이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날마다 기도할게."

잠에서 깼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무슨 꿈인지 혼란스러웠다. 몸도 굳어버린 듯 다시 잠들 수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내가 너를 위해 날마다 기도할게." 마치 옆에서 들은 것처럼 선명했다.

꿈속에서 느꼈던 절망감이나 슬픔을 위로해 주는 말이었다.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다독여 주는 말이었다.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정당화시켜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MBTI 테스트 항목 중 하나다. 테스트를 다 하고 나서도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에 이 항목을 읽고 '비동의'를 클릭하려다 멈칫하고 '동의'를 선택했다.

'그래야 한다'와 '그러고 있다'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고 싶지 않을 뿐, 실제로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나도 모르게 설명하고 이해를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종종 발견한다.

상대방이 나를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선을 넘으면, 그가 내 생각대로 생각해 줬으면 하는 조바심이 생기고, 더 나아가 그의 생각이나 의견을 지배하고 싶은 비뚤어진 욕구도 갖게 될 수 있다.

내 생각은 나의 것, 그의 생각은 그의 것이다.

나를 떠난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듣는 사람의 몫이다.

나는 내 몫에만 충실하면 된다.


"설명하느라고 애쓰지 마세요.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빛나는 순간(Shining Moment), 파울로 코엘료, 2020⟫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피 흘림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 - 아들의 죽음, 십자가의 고통 - 을 생각해 보아도 용서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용서 그 후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내가 이미 용서한 사람이 내게 계속 상처를 줄 때, 나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용서하기 전과 똑같은 태도로 그를 대한다면 나는 다시 상처받게 되고 그를 다시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고통에 이어 깊은 고민과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단지 내게 상처를 준 그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용서는 불가능하다.

섣불리 한 용서가 연민이나 동정이었음을 머지않아 깨닫게 될 뿐이다.

진정한 용서는 타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는 것, 그것이 용서다.

그래야 다시는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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