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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an 14. 2024

고립보다 단절

영화 <Leave the World Behind>를 보고

넷플릭스를 들락거리다 한 영화의 트레일러에 빠져들었다. 거대한 유조선이 서서히 해안으로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배를 피해 뛰기 시작한다. 사람이 가득한 해변으로 돌진하던 배는 그대로 모래사장으로 한참이나 밀려들어오고 나서야 멈춘다.

<Leave the World Behind, 2023>, 루만 알람(Rumaan Alam)의 동명 소설 [Leave the World Behind, 2020]가 원작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트레일러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좋아하는 배우 이선 호크와 줄리아 로버츠의 출연 때문이었다.


어맨다(줄리아 로버츠)와 클레이(이선 호크), 아들 아치와 딸 로지는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식으로 가족여행을 나선다. 그러나 집을 떠난 설렘도 잠시, 여행길에서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통신이 두절되고 만다.

한밤중에 이들을 찾아온 GH(마허샬라 알리)와 루스(마이할라 헤럴드)는 어맨다 가족이 빌린 집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며 같이 지낼 것을 청한다. 이들은 한 집에 머물며 물과 전기 외의 모든 것 ⎯ 휴대전화, TV, 라디오, 내비게이션  ⎯ 이 끊겨버린 세상 속에 갇히게 된다.

숲에서 찾아온 수많은 사슴 떼와 뒤뜰 수영장에 나타난 홍학의 무리, 내비게이션 기능 정지로 추락하는 비행기들, 자율주행 오작동으로 끝도 없이 충돌하는 자동차들의 행렬, 드론에서 뿌려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단지, 귀를 찢는 듯한 굉음 등 이상한 일들이 이들 주위에서 연속으로 벌어진다. 아무와도 연락할 수 없고 뉴스조차 접할 수 없는 침묵과 공포가 계속된다.


사진 indiewire.com


마치 세상 모든 것들이 입을 다물어버린 듯한 시간 속에서 GH와 어맨다는 사이렌 소리, 사람들의 소리를 그리워한다. 아무도 이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이 상황을 통제할 수도 없다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GH는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이웃 대니는 이 모든 재앙의 뒤에 한국인들이 있다고, 혹은 그중 몇은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편협한 자국 중심적 사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 속에 벌어진 상황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인물의 입을 빌은 이 말은 원작 소설이 발표되던 해인 2020년 팬데믹을 겪으며 일부 미국인들이 보인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로지를 찾기 위해 근처 숲 속 작은 헛간에 들어간 어맨다와 루스. 어맨다는 말한다  ⎯ 우리는 늘 서로에게 못되게 굴면서 깨닫지조차 못하며, 지구의 생명체들에게도 못할 짓을 하면서 (환경과 동물복지를 위해) 종이빨대를 쓰고 방목해 키운 닭을 주문하니 괜찮다 여긴다고. 집단적 미혹에 의해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그러자 루스가 말한다  ⎯ 그토록 형편없는 존재가 우리라 해도, 결국 우리에겐 우리뿐이라고.

위기에 처할 때 서로를 의심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우리의 모습, 우리가 만든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의지하고 희망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우리 서로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회라는 세련된 기법을 쓰지 않은 직접적인 메시지가 영화 군데군데 보였다. 어쩌면 클리셰로 느껴질 이들이 오히려 날카롭게 파고드는 건 영화 속 상황을 언젠가 실제로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감 때문이었다.


사진 midwestfilmjournal.com


영화는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어 마치 책을 한 챕터씩 읽어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첫 장면부터 귀를 사로잡는 음악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해 준다. 스마트폰도 TV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세상, LP레코드판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어맨다와 GH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카메라는 가끔 위로 점점 멀어지며 그 지점이 속한 전체의 맥락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이에게 전지적 시점을 제공하는 듯하지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이렇듯, 영화를 보는 나도 영화 속 인물들처럼 사건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영화를 보게 된 것이 다른 아포칼립스 영화와 구별되는 점이었다. 영화 속 인물들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했다.


숲을 방황하던 로지는 빈 집에 들어가 누군가 대피장소로 마련해 놓은 지하 벙커를 발견한다. 인터넷이 끊기는 바람에 볼 수 없었던 시트콤 <프렌즈> DVD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로지의 환한 얼굴 ⎯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행복을 바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프렌즈>의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누구도 마지막 순간은 피해 갈 수 없다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단절은 고립을 야기한다. 누구와도 아무 데와도 연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 아닐까.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속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모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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