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끊은 지 두 주일쯤 됐다.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혀 온 두통이 커피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했었다. 그러나 한 잔은 슬그머니 한 잔 반이 되고 두 잔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소화불량과 역류 증상을 느끼면서, 괜찮아질 때까지 커피를 아예 안 마시기로 결심했다.
"나 라테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커피 없이는 못 살 것 같다던 내가 보리차로 연명하는 걸 보며, 남편도 아침마다 커피 만들던 손을 놓고 덩달아 커피를 굶고 있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한 말이었다.
이것저것 식재료와 과일을 사러 동네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단골 카페에 들러 남편은 라테를, 나는 재스민 차를 주문했다. 카페 안의 두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창가 테이블에는 이어폰을 낀 청년이 앉아 랩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안쪽 다른 테이블에서는 친구인 듯 보이는 소녀 둘이 샐러드와 베이글을 먹고 있었다. 하도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해 있어서 마치 그들만의 세상에 있는 듯 보였다. 꺄르륵 자지러지는 그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때마침 흘러나온 음악이 들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였다.
낮게 드리운 구름과 옅은 그림자들이 비치는 창가, 천장으로부터 줄을 타고 내려온 이국적인 조명등이 오늘따라 카페 안을 어딘지 색달라 보이게 했다. 그 생경스러움은 바로 카페 안을 흐르던 음악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엘비스의 노래와 소녀들, 시각과 청각의 묘한 조합 속에 오래전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던 한 친구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친구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생각났다. 긴 속눈썹이 주렁주렁 달린 눈을 몇 번씩 감았다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활짝 웃을 땐 얼굴이 호리병 모양이 되던, 타고난 예능적 감각으로 학교 행사 때마다 춤이며 연극을 도맡던 아이. 지금은 그녀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똑같이 보라색을 좋아한 나머지 토요일 반나절 수업을 마치고 보라색 바지를 사겠다고 함께 헤매 다닌 일, 다음 학년 반이 갈려서 껴안고 서럽게 울던 일(그땐 반이 갈리는 게 친구 사이의 재앙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해질 무렵의 한강을 좋아해서 다리 위를 같이 걷던 일, 함께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일 ⎯ 그녀가 없었다면 솟구치던 열정을 학업이란 무게로 짓눌러야 했던 그 시절을 견뎌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언젠가 꼭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비밀고백처럼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 안에 있던 글쓰기에의 열망을 처음으로 표현한 순간이었다.
주문한 재스민 티가 나오기까지 오분 여 동안 마치 별나라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몸은 카페 안에 있었지만 마음은, 생각은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엘비스의 노래와 카페의 영롱한 등과 갖가지 티의 향기가 섞인 속에서 마치 허공에 붕 뜬 듯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오래된 테이프를 역시 오래된 카세트라디오에 넣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한다며 어느 날 쑥스럽게 건네주던 그녀가 직접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였다. 수십 년 전 그녀의 손길이 그대로 담긴 엘비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네가 보낸 편지를 기억해.
우리가 같이 갔던 곳 모두를 가보고 있어.
나는 온종일 너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
너의 향기가 묻은 리본을 아직 가지고 있어.
우울할 때 너의 흔적은 나를 위로해 줘.
나는 무엇을 가질 수 있고 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모든 걸 준다 해도 그건 너의 흔적일 뿐이니까.
<Anything That's Part of You>, 엘비스 프레슬리, 1962
(가사 일부 번역, 인용)
Anything That's Part of You - Elvis Pres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