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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an 18. 2024

눈이 내리면

밤새 눈이 많이 와있었다. 쌓인 눈을 보는 건 올 겨울 들어 처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통해 하얀 눈을 바라보는 건 왠지 낭만적이다.

바람 많고 눈 많은 시카고를 떠나온 지 벌써 열한 달 째다. 열여섯 해를 살았던 도시지만 뉴욕으로 오고 나서 1년이 다 돼가도록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어서였을까, 친한 사람들이 좀 더 따뜻하고 세금이 적은 곳으로 떠나가서였을까. 나도 이제 그만 시카고를 떠나고 싶었다.


시카고의 겨울 평균기온은 화씨 24°F(-4℃)에서 28°F(-2℃) 정도지만, 바람이 많고 건조해 체감온도는 10도쯤 더 낮다. 한겨울 추위는 옷을 파고 들어와 살갗을 에일 듯하다. 게다가 한번 눈이 오기 시작하면 이삼일 계속되는 경우도 많다. 쌓인 눈 때문에 창문은 물론이고 현관문과 차고 문이 잘 안 열리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고 나서는 눈 예보가 뜨면 미리 마트로 달려가 먹거리를 사놓는 일에 익숙해졌다. 눈 폭풍도 많아 운전하다 도로에 갇힌 적도 있다. 자동차 위에 눈이 쌓일 걸 대비해 눈을 쓸어낼 장비 몇 가지는 늘 트렁크에 갖고 다녀야 한다. 겨울이 길어서 심할 땐 5월에도 눈발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밤새 눈이 내린 이른 아침 뒤뜰에서 하얀 눈 위에 퐁퐁 찍힌 새 발자국, 토끼 발자국, 다람쥐 발자국, 그리고 가끔은 정체 모를 동물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눈이 오면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도 큰 일이었다. 쌓인 눈을 방치하다 행인이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우리 집을 상대로 소송을 해올 수도 있기에 집 앞 도로와 현관문 앞, 차고 앞 진입로의 눈은 반드시 치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난생처음 뜬금없이 삽질을 시작했던 거다.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눈이 완전히 그치면 치우러 나가야지 하고 있는데, 앞 집 아이들이 우리 집 문을 노크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꼬마들은 우리 집 앞 눈을 단돈 1달러에 치워주겠다며 손에 든 어린이용 삽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아이들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아이들의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 하고는 아이들이 우리 집 앞 눈을 다 치우는 동안 집 안에서 기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아이들이 왔다 갔다 종종 대며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마무리는 엄마가 도와주는 모습도 보였다. 눈을 다 치우고 나서 다시 우리 집 문을 노크한 아이들에게 약속된 1달러에 1달러씩을 더 주며, 일을 잘해주어 기분이 좋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들 뒤에 서있던 엄마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청하니 그녀 역시 고맙다며 활짝 웃었다.


어느 해 겨울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눈이 내렸다. 마침 출장 중인 남편이 부러웠다. 고등학생이었던 둘째와 함께 눈을 치우러 나서긴 했는데 막막했다. 더구나 우리 집엔 큰 제설용 삽이 하나밖에 없었다. 둘째와 낑낑대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파내고 또 파냈지만 어림도 없었다. 우리는 옆 집에서 큰 삽을 하나 더 빌려오기로 했다. 옆 집은 둘째의 학교친구 아나네 집이기도 했다. 삽을 빌리러 간 둘째가 잠시 후 삽도 친구도 다 데리고 나타났다. 아나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따라온 것이었다. 가까스로 눈을 다 치우고 나니 숨도 차고 허리도 아팠다. 털모자와 두꺼운 장갑으로 단단히 몸을 감쌌지만 어느새 손도 두 볼도 꽁꽁 얼어있었다. 추운 날씨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힘든 일을 도와준 아나가 몹시 고마웠다. 나는 예쁜 봉투에 5달러를 넣어 빌렸던 삽과 함께 전해주었다. 우리를 위해 써준 시간과 귀한 노동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다른 편 옆집 케빈은 소형 제설기를 갖고 있었다. 눈이 온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제설기를 갖고 나와 우리 집 앞까지 눈을 치워주곤 했다. 남편이 출장 가고 없을 땐 아나 아빠와 케빈이 같이 나와서 수다를 떨며 우리 집 앞 눈까지 다 치워놓곤 했다. 아나 아빠가 집을 비울 땐 남편과 케빈이 수다를 떨며 아나네 집 앞까지 눈을 치워주었다.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훈훈한 이웃사랑이 있어 괜찮았다.

정 많고 따뜻했던 이웃들, 잘 지내고 있을까. 겨울을 맞아 지금쯤 또 눈과 열심히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니, 혹독했던 시카고의 겨울이 자꾸 생각난다. 생각 안 날 줄 알았는데. 그립지 않을 줄 알았는데.


© Anna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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