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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26. 2022

아줌마와 BTS

몇 년 전, 팬데믹 전이었다.

서울에서 온 출장 팀과 함께 다운타운에 갔던 남편이 진기한 풍경을 보았다며 집에 돌아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차 밖으로 수많은 인파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사는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운타운 한복판에 줄을 서 있는 건 처음 보았다고 한다. 길게 늘어선 줄이 커다란 빌딩을 두어 바퀴쯤 돌고도 남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져 있길래, 굉장히 유명한 가수가 콘서트라도 하나보다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옷과 가방에서 'BTS'라는 글자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기다리며 기념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던 것이다. BTS의 팬들을 해외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인기를 실감한 일행 모두가 입이 떡 벌어졌다고 한다.

남편과 남편의 일행이 목격한 광경은 2019년 시카고 솔저 필드에서 열린 BTS 콘서트 직전 모습이었다. 솔저 필드(Soldier Field)는 1924년 완공된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수용인원 약 61,500명의 큰 규모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기장이다. 웬만한 가수는 꿈도 못 꾸는 이곳에서의 콘서트를, BTS는 이틀간 객석을 꽉 채우며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BTS의 인기는 날로 더해져, 이곳의 각종 토크쇼와 시상식 공연 등에 등장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더욱 신기한 건 아침에 일어나 라디오를 틀면 BTS의 'Butter''Dynamite'를 매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끔 여기가 어딘지,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리는 순간도 있었다.

BTS 이야기에 덧붙여, 나의 15년 지기 타이완 친구는 한국 드라마 광팬이고, 나를 담당하는 치과 간호사와 그 딸은 K-pop 예찬론자이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다음날 센터에 출근한 나를 보고 어제 TV 봤냐며 모두들 '어메이징'을 연발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나는 그날 "뭘~, '1917'도 꽤 잘 만들었던데?" 하며 승자의 여유 부림을 잊지 않았다. 어쩌다 남의 나라에 와 살면서 드물게 누려본 짜릿한 순간이었다.


2020년 말, 타임지는 그 해의 엔터테이너로 BTS를 선정했다. 나는 그때부터 BTS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그들의 음악과 팬덤 아미(A.R.M.Y)가 궁금했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이 BTS에 대해 물어볼 때를 대비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호기심으로 듣기 시작한 그들의 음악은 내겐 신세계였다. 그때까지 음악은 멜로디가 다인 줄 알았던 나는 랩과 비트의 힙합을 접하고 그 경이로움에 당혹감마저 느꼈다.

RM슈가의 거침없는 랩을 들으면 속이 시원하고 힘이 났다. 정국의 서정적인 노래와 의 낮은 목소리는 지칠 때 위로가 돼주었다. 지민제이홉의 아름다운 춤 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RM, 제이홉의 조화로운 리더십과 멤버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관계도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젊은 시절의 고뇌가 담긴 노래를 들을 때는 그 무렵의 내가 생각났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그들의 UN 연설 'Speak Yourself'(2018)와 맞물려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해 준 그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따뜻한 밥 한 끼 해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BTS 노래만 들었다. 운동할 때도 BTS 노래를 틀어 놓았다.

친구들한테 BTS 얘기를 했더니 들어는 봤는데 멤버가 몇 명인지도 모르고 누가 누군지도 모른다며 재미없어했다. 나도 재미없어서 그만두고, 이번엔 딸들한테 BTS 얘기를 했더니 자기들은 걸그룹 노래만 듣는다며 관심 없어했다.


작년 연말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BTS 앨범과 화보들을 보내주었다. 좋으면서도, 왠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선물인 것 같아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래도 아이들이 보내준 브로마이드 한 장을 벽에 붙이며 내가 뭘 제일 좋아할지 아이들이 고민했을 걸 생각하니 무척 고마웠다.

올해 초, 친구의 아들과 며느리가 설날 겸 결혼 1주년을 함께 축하하자고 놀러 왔다. 벽에 붙여 놓은 BTS 사진을 한참 쳐다보길래 혹시 아줌마가 주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황급히 장황한 설명에 나섰다.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이 웃겨서 또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작은 딸은 아미가 되었다. 나한테 보낼 선물을 고르면서 BTS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노래를 듣다 보니 좋아졌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친구들과 함께 BTS 라이브 스트리밍 콘서트도 갔다 오고, 한국어도 더 열심히 공부한다. 나랑 통화할 때면 언니가 BTS 얘기를 같이 안 해준다며 자기 얘기를 좀 들어달란다. BTS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어 외로웠던 엄마 마음을 이제 알겠냐고 오랜만에 큰소리를 쳐본다.

미대에 다니고 있는 작은 딸은 BTS 노래를 듣고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가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 는데, BTS 아는 나는 딸의 그림을 금방 알아볼  있다.


BTS는 내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딸과의 특별한 소통을 선물해 준 고마운 존재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세월을 따라 흘러가지만, BTS는 오래오래 건강하고 발전하며 우리 곁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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