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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13. 2024

이름을 불러줄 때

김춘수의 <꽃>(1952)을 읽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고등학교 때 갖고 다니던 책받침에 제일 많이 등장하던 시다. 사춘기 감성을 두드리던 시어들 '그', '꽃',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에 꽂혀서는 동네 길에서 마주치던 오빠나 좋아하던 선생님을 떠올리며 읽던 시다.

지금은 그 시절 한 친구가 떠오른다.


방학 때 시작된 H와의 편지 교환은 개학 후에도 계속되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살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로 쓰는 이야기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쏟아내는 말보다 훨씬 특별하게 느껴졌다. 내밀하고 절절한 감정을 담을 편지지가 있고, 글자 하나 흘리지 않고 오직 상대에게만 전해줄 편지봉투가 있었다.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말은 쉽게 잊혔지만, 편지는 두고두고 읽어볼 수 있었다.

H는 출석부에 있는 자신의 이름과 편지봉투에 적어 보낸 이름이 왜 다른지, 어느 날 말해줬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싫어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골랐다고 했다. 이름을 바꿔달라 여러 번 부탁했지만 부모님이 들어주시지 않아, 학교 밖에선 자신이 지은 이름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면 좋겠다고도 했다.

H가 옛날식 이름보다 좀 더 예쁜 이름을 갖고 싶나 보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나와 몇몇 친구들은 H를 새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나는 여기서 공식적으로는 원래 내 이름으로 불리지만 ⎯ 이름(first name)이 성(last name) 앞에 불리긴 한다 ⎯ 대부분 Anna로 불린다. 아이들 친구 부모나 같이 일한 동료들, 친구들 중엔 내 한글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영어 이름을 만들지 않고 한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아이들이나 남편과 달리, 굳이 나만 영어 이름을 쓰게 된 이유는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이름이 불려야 할 때 그들이 발음하는 내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닌 것 같았다.

이름은 누군가를 처음 만나 서로 알아 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할뿐더러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아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새로 영어 이름을 짓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릴 때 성공회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얻은 이름 Anna가 생각났다. Anna도 여기 사람들은 '애나'라 발음하니 고향에서 불리던 '안나'와 다르긴 하지만,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얼굴을 봐야 하거나 생전 처음 듣는 것 같은 이름이 내 이름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나는 잊고 지내던 내 또 하나의 이름 Anna를 찾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꽤 오래 나는 H를 만나지 못했었다. H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두 오빠는 대학에 갔지만, 여자가 대학 가 뭐하냐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에 H는 원하는 미술대학에 갈 수 없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에도 H는 늘 그 문제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입 모의고사를 치를 때마다 H는 혼란스러워했고 얼굴이 어두웠다.

졸업 후 H는 열심히 일하며 바쁘게 지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었고 학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나 이름 바꿨어. 이제 나 진짜 H야!" 말하는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며 진짜배기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내가 편지봉투마다 써줬던 H의 이름이 법원 심사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다며 그녀는 그날 밥을 샀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밥을 얻어먹었다. H는 그동안 모은 돈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곧 대학에 입학할 거라는 깜짝발표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온 그날에야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도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지 촌스러운 이름을 버리고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이름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게나 이름 붙여져 온갖 차별을 견뎌야 했던 삶을 벗고, 스스로 선택한 이름과 함께 꿈꾸던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미대에 꼭 진학해 꿈을 펼치길,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길, 사랑받고 또 사랑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녀라면 꼭 그럴 거라 믿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한 존재에게 의미를 불어넣는 일과 같다. 그리고 나와 교감하기 시작한 순간 그가 내 삶에 들어온다. 이름은 존재, 이름 부름은 관계다.

고등학교 시절 달콤하게 다가왔던 김춘수의 시 <꽃>은 어느새 존재의 외침이 되어 마음 깊이 스며든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고 소멸할 때까지의 그 본연의 외로움을 장착한 존재의 외침으로 말이다.

이름에는 지은 이의 희망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나는 오늘 내 이름에 내 꿈을 담아본다. 그리고 불러본다.

내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나에게로 돌아와 고단한 마음을 누인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총총이는 별처럼 나는 비로소 세상 하나뿐인 존재, 빛나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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