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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May 06. 2024

실버걸의 꿈

Sail on Silver Girl

라디오를 틀어놓고, 밤새 굳어있던 몸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어주고 있었다. 등을 바닥에 대고 반듯이 누워 창으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눈을 감았다. 깨어난 지 몇 시간 안 된 잠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갈 것만 같던 순간, 라디오에서 꿈결처럼 노래가 흘러나왔다 ⎯ 사이먼 &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그러자, 보드라운 햇살과 감미로운 음악에 이끌려간 곳은 고 2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새 학년 특별활동은 종류가 더 늘어나 이전보다 선택의 폭이 넓었다. 그중에서도 팝송반은 이름만 들어도 설렜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망설임 없이 친구들과 함께 팝송반에 들었다.

그 무렵 우리는 DJ 부스가 있는 학교 앞 분식집에 참새가 방앗간 들락거리듯 가곤 했다. 쪽지에 제목을 적어 수줍게 건네면 얼마 안 있어 내가 신청한 노래가 홀 전체로 퍼져 나왔다. DJ의 낭만적인 멘트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뽑힌 기쁨에, 잠시나마 다람쥐 쳇바퀴 같던 일상에서 빠져나온 기분이곤 했다.

그런가 하면, 참고서를 사러 가던 동네서점 한쪽 구석에는 언제나 팝송책들이 꽂혀있었다. '최신팝송'이나 '히트팝송' 같은 제목의 두툼한 책을 펼치면 외국팝송의 악보와 가사를 볼 수 있었다. 영어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적어놓은 그 책들은 우리의 떼창 욕구를 몹시 자극했다. 아껴둔 용돈으로 팝송책을 사서 열심히 따라 부르며 가사를 외운 이유였다.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팝송을 듣고 부를 수 있다니 그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그 시절 우리를 매료시킨 마돈나, 마이클 잭슨, 듀란듀란 등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팝송반에 들어갔던 우리는, 그러나 선생님의 선곡에 무척 실망하고 말았다.

팝송반을 맡은 영어 선생님이 들고 오신 건 죄다 1960, 70년대 가수들의 노래였다. 우리는 가사가 적힌 프린트물을 돌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게다가, 교실에서 팝송을 실컷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도 갈수록 구겨져 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노래 가사를 죽 쓰더니 별안간 문법을 강의하시기 시작했다. 이건 뭐, 영어시간인지 특별활동 시간인지 구별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절 접속사, 현재진행형 동사... 밑줄 쫙, 우리말 해석은 뒤에서부터 앞으로....

비틀스의 <Let It Be>, <Yesterday> 같은 노래의 가사들을 쪼개고 분석하고 해석해야 했다. 다 아는 노래, 진부한 번역, 들끓던 우리의 정서와 딴판인 곱기만 한 노랫말에 그만 질리기 시작했다. 아, 재미없다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 내 귀를 뚫고 들어온 노래가 바로 사이먼 &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였다. 그 후 삼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처럼 말이다.


흘려듣기만 하던 노래를 그토록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니. 음악에서 얻는 위로가 바로 이런 거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노랫말의 발음이나 뜻은 아무래도 좋았다. 신나고 비트 있는 음악이 내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든다면, 이 노래는 심장을 자꾸 어루만져 주었다. 빠른 템포의 음악이 동갑내기 친구 같았다면, 이 노래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언니 같았다.

모든 게 공부로만 귀결되던 시절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어쩌면 나만의 자유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짜인 시간표나 주어진 교과목들 말고, 비록 거칠게 흐르는 물 위에 내 몸을 눕혀 사랑하는 이를 위한 다리가 되더라도 내가 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그 거센 물결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절 가사 속 꿈꾸는 은빛 여인(Silver Girl)이 되고 싶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빛나는 꿈을 꾸고 싶었다.


눈을 떴다. 햇빛은 여전했다. 흐르던 음악이 팝송반 교실에서였는지 우리 집 라디오로부터였는지 잠시 헷갈렸다. 추억을 꿈으로 꾼 걸까. 교실은 답답했지만 음악만은 시간을 초월한 듯 아름다웠다.

꿈 많던 소녀는 어느새 하얀 머리카락이 많아진, 머지않아 실버라는 말이 어울릴 중년이 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노래를 듣고 그때도 지금도 꿈을 꾼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If you need a friend

I’m sailing right beh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ease your mind


사랑하는 이여, 노를 저어요.

노 저어 가요.

당신이 빛날 때가 되었어요.

당신의 모든 꿈이 이뤄질 테니

그 꿈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보아요.

당신이 친구가 필요하면

내가 당신 뒤에서 노 저어 갈게요.

거친 물 위의 다리처럼

당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게요.


<Bridge Over Troubled Water>(사이먼 & 가펑클, 197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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