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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05. 2024

버스 타기

이사 온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버스를 타봤다.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미국에서 스무 해 가까이 사는 동안 한 번도 시내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 그러니 서울에 갔을 때를 빼면 시내버스 탈 기회가 거의 없었던 거다.

서버브에서만 살다 도시로 온 후 엄청난 차고 사용료와 주차비용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느껴 자동차를 팔고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해 왔다.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동네에 살고 있으므로 웬만한 곳은 지하철과 도보로 갈 수 있다. 초행이거나 먼 곳에 갈 때는 택시를 타면 된다. 그런데 주말에는 가끔씩 지하철 운행이 제한되곤 한다. 정차하지 않는 역이 있는가 하면 아예 맨해튼 시내 방향으로 운행되지 않을 때도 있다. 지난 토요일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동안 동네 큰길에 지나다니는 버스들을 보며 저건 어떻게 타는 걸까 궁금하기도 걱정되기도 했었다.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이곳 버스, 요금은 어떻게 내는 걸까 서울의 버스처럼 환승제는 있는 걸까 정류장은 어딜까 의문 투성이었다. 그런가 하면, 버스에 올라탔다가 요금을 못 내고 헤매면 어쩌지 내릴 곳을 놓치면 어쩌지,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나의 소심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깨알 같던 불안감은 어느새 눈덩이가 되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버스를 볼 때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상자나 심지어 괴물이 들어찬 기괴한 궤짝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나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우선 휴대폰 앱을 통해 버스 노선과 정류장을 확인했다. 익숙한 길 이름들이 눈에 들어오니 좀 안심이 되는 듯했다. 동네 큰 길가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나가 표지판에 붙어있는 노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는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래지 않아 기다리던 32번 버스가 다가왔다. 나는 줄의 가운데쯤 서서 사람들이 어떻게 요금을 내는지 관찰했다. 다행히, 버스를 올라타면 바로 보이는 곳에 지하철의 그것과 똑같이 생긴 카드리더기가 있었다. 무사히 요금을 치르고 눈을 들어 버스 안을 바라본 순간, 그동안의 불안감은 벌써 저만치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걱정을 했나 싶게 마치 서울에서 버스를 탄 듯한 친근함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추운 겨울날 난롯가에 앉은 기분이 됐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버스 안의 온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버스 안은 구조와 분위기까지 서울의 시내버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류장도 생각보다 촘촘해서 마을버스를 탄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이하다고 느낀 한 가지는 창문 옆 노란 줄이었다. 줄을 잡아당기면 버스 앞쪽에 'Stop Requested'라는 빨간 글자가 들어오며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한다. 벨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노란 줄을 더 많이 사용했다.



괜한 걱정으로 울렁울렁하던 마음을 깨끗이 걷어낸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바닥 친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서는 매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두려워하던 일에 도전해 보라는 말을 언젠가 들었다. 해본 적 없던 것을 감행하는 작은 용기 냄의 연습이 쌓이면 훗날 큰 기쁨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겨우내 얼어붙었던 마음을 하늘의 구름처럼 둥둥 띄워본 날이었다.


© Anna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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