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거와 붙여넣기

by Anna Lee

길어난 손톱을 무심코 바라보다 든 생각, '나 정말 오랫동안 글 안 썼네.' 긴 손톱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던 건 한동안 랩탑의 자판을 두드릴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이 될 줄 알았던 여행이 두 달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여행지에서 이사 아닌 이사도 했다. 여행 짐을 전부 꾸려서는 체류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숙소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은 다행히 여분으로 처방받아둔 게 있었고, 계절이 바뀌어 부족한 옷은 몇 가지 사면 그만이었다. 그보다는 두고 온 집이 더 걱정이었다.

두 달이나 비워두었던 집에 들어선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창 가에 놓아둔 화분들이었다. 꼼짝없이 말라죽었을 줄 알았던 그들은 주렁주렁 꽃을 매단 채 바싹 야위어 있었다. 얼른 물을 주니 이파리들이 푸르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언제 꽃을 피웠을까,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꽃이 피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살아있어 줘서 정말 고맙고 대견해.. 물기를 머금은 화분들을 바라보며 열네 시간 비행의 피로를 잠시 잊었다.


나름 바쁘게 보내기도 했지만, 나는 이번 여행에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다. 글쓰기가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글쓰기를 뺀 내 삶이 어떨까 궁금했다. 뭔가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기 위해서는 그걸 잠시 소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글쓰기를 뺀 삶이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글쓰기가 생각날 때마다 도리도리를 하며 애써 딴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글이 쓰고 싶어질까 봐 한동안은 서점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또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깨끗이 깎인 손톱이 달린 손 끝으로.


너무 멀어서 시간대가 다른 곳에 있다 돌아오면 낮과 밤을 혼동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라, 의식도 멀쩡하고 시력도 여전한데 내 몸은 낮에 밤이길 주장하고 밤에 낮이길 주장하는 것이다. 내 몸의 상태와 이 세상이 부조화를 이룰 때면 어김없이 피로감, 착각, 헛소리 같은 증상들이 생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내 몸이 낮, 밤을 구별하도록 도우려 하지만, 별 보람 없는 날들이 계속되곤 한다. 그래서 이번엔 시차에 별로 신경 안 쓰고 졸릴 때 자고 정신이 들면 일어났다. 몸이 자연스레 시간에 적응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대신, 잠들기 전에 알람을 맞춰놓고 수면 시간은 조절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 주가 지나는 동안 아무 때나 배고프고 아무 때나 졸리던 내 몸은 마지못해 낮과 밤의 시간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에게 항복했고, 저녁에 깔리는 땅거미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낮과 밤, 깨어있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먹는 행위, 다리를 움직여 걷거나 앉는 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일상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글쓰기를 내 생활에서 소거했다가 다시 붙여넣기 했듯, 일상 밖에 있던 나도 어느새 일상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슬그머니.


새로운 곳을 탐구할 수 있는 게 여행의 묘미라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이 밑받침될 때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여행의 아이러니인 것 같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는 내 일상이 반갑다. 언제나 새로운 것, 산꼭대기 희열만 추구한다면, 그리고 실망을 거듭한다면, 잔잔한 일상에 대한 고마움을 좀처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사는 곳에의 그리움이 삶에 늘 공존한다.


나에게 글쓰기는 나 자신에게 띄우는 편지다.

고백이자, 가끔은 비밀도 숨어있는 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이 나는 한없이 고맙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 그 편지들이 내게 치유와 성숙을 가져다줄 거라 믿으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