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여행하다 1
여행 준비를 꼼꼼히 하려고 플래너도 쓰고 리스트도 만들었다. 뒤늦게 잊은 걸 발견해 발을 동동 구르거나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국내여행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선 엄청나게 곤란한 일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잘 준비할 순 없을 거야', 집을 나서던 아침, 깔끔한 집안과 정갈한 여행 가방을 바라보며 상쾌했다. 여행을 마치고 잘 정돈된 환경으로 돌아와 쉴 수 있다는, 보험 같은 걸 들어놓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뿌듯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빠뜨린 게 하나 생각났다. 여행을 훼방 놓을 만큼 치명적인 건 아니었지만, 꽤 공들여 준비했는데도 집을 떠나자마자 잊은 게 생각나다니 약이 올랐다.
비행기에 앉아 이륙을 기다리는 동안 빠뜨린 게 또 하나 생각났다. 그것 역시 사소한 거에 불과했지만 얼마간의 비용이 드는 일이었고, 나 자신에 대해 실망스러워졌다.
마침내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날기 시작하고, 여느 때처럼 귀가 멍멍해지면서 차가운 터널 속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 전에 느꼈던 실망감, 약 오름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예전의 나였다면 계속 마음에 걸렸을 텐데, 웬일인지 빨리 괜찮아졌다. 차츰 너그러운 사람, 나은 사람이 돼가는 걸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열여섯 시간의 비행 ⎯ 무릎과 허리에 통증이 찾아들고, 차갑고 건조한 공기에 주변에서 끊임없이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약 두 시간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계속 받아먹고 앉아만 있으니 마치 우리 안에 갇혀 살찌워지는 돼지가 된 것 같았다. 착륙 한 시간 전쯤,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신발을 도로 신으려니 발이 퉁퉁 부어 들어가질 않았다. 신발 뒤축에 손가락을 끼워 억지로 틈을 만들고 발을 쑤셔 넣었다. 신발 안에 겨우 자리 잡은 발은 욱신거리고, 신발과 발 사이에 끼었던 손가락은 부러질 듯 아팠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불편함과 괴로움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나는 또 다 잊고 고향에 다시 갈 게 뻔하다.
서울에 가면 언제나 일 분 일 초가 아깝다. 할 일도 많고 볼 사람들도 많은데 야속한 시간은 조금도 늦게 갈 줄 모른다.
일정을 촘촘히 짜고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움직이다 보면, 며칠은 몸져눕는 일도 생긴다. 그러면 나는 또 그 시간이 아까워 눈물을 줄줄 흘린다. 이젠 요령도 생겨서 도착하자마자 병원, 안경점, 은행 등 중요한 일부터 보고, 몸을 아끼고 조심해 가며 지낸다.
이번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곳곳에서 불친절과 각박함을 겪었다. 사람들은 여유가 없고 무겁고 어두웠다. 지난 2년과 12.3 계엄으로 이어진 그늘 때문이었을까. 어서 빨리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더 부강한 우리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가 파면됐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새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성실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신기할 정도로 잘 짚어냈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면 저 너머 어딘가 떠다니던 메시지를 지금 여기로 데려오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건 배려이고 존중이며 겸손이다.
서울에 있는 동안 전통시장에 자주 갔다. 분식집에서 순대와 떡볶이를 사 먹고, 종이컵에 담아주는 닭강정과 호떡도 줄 서서 기다리다 사 먹었다. 나에겐 시장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나 보다. 옛날 엄마 따라다니던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야생적이고 지저분했지만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했었다 ⎯ 처음 보는 물건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음식들, 거칠고 투박하지만 인정 많던 시장 아주머니 아저씨들. 시장에 가면 어린 시절 호기심, 어른이 되고 싶던 꿈이 생각난다.
모교에도 들렀다. 마침 축제기간이라 학교는 온통 들뜨고 활기에 넘쳤다. 옛날 가던 식당이나 술집이 혹시 아직 있을까 골목골목 돌아다녀봤지만 거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캠퍼스도 학교 주변도 많이 변했는데, 그때의 남자친구만 흰머리 듬성듬성 아저씨가 되어 한결같이 내 옆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