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과 할로윈

by Anna Lee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함께 시카고 우리 집을 방문하신 건 내가 몬테소리 교사 자격과정을 시작하고 반년이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네 분 모두 연세가 비슷한 데다 예전에 같이 여행하신 적도 있어 한 집에서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오시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늘어나는 걱정에 나는 종종 잠을 설치곤 했다. 남편은 재취업 준비로, 나는 몬테소리 공부로 바쁜 나날에 별안간 식구가 두 배로 불어난 것이다. 나의 부모님과 함께라고는 해도 시부모님 앞에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고, 아무리 네 분이 잘 지내신다고 해도 엄연히 사돈지간이었다. 자칫 분위기가 냉랭하거나 서로 다투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들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한 달 머물다 갈 예정이었던 부모님들은 두 주를 연장해 한 달 반을 함께 지내시게 되었다. 워낙 즐거워하셨던 데다, 비행기 여행이 쉽지 않은 연세니 힘들게 온 김에 더 있다 가시라고 나와 남편이 붙잡았던 것이다.

골프와 쇼핑을 함께 다니며 친해진 네 분은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편하게 지내셨다. 내가 강의를 들으러 나가야 하는 날은 엄마와 어머니가 번갈아 식사 당번을 해주셨고, 서울로 가시기 며칠 전에는 극구 사양하는 나를 뿌리치고 두 분이 김치까지 담가 주셨다. 부모님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방문하셨지만, 모두 함께 지냈던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들 하신다.

부모님 네 분과 지내는 일은 때로 남편과 내게는 고되기도 했다.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서버브에서 길을 모르는 네 분끼리 다니는 일은 불가능했으므로 하루도 빠짐없이 네 분 부모님과 방학 중이었던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운전해 다녔다. 부모님들이 서울로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흐뭇했던 마음과 달리 몸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마치 친구와 놀러 온 것처럼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게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잊지 못하고 추억하시는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그때 그 시간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게도, 오랜 시간 양쪽 부모님이랑 한솥밥을 먹다 보니 관계의 구분이 점점 엷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한테 핀잔을 들은 나를 어머님이 감싸주시는가 하면, 어머니와 엄마가 한 편이 되어 나와 때아닌 세대 간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엄마에게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면 어머니가 나를 나무라기도 하셨다. 이러다 누가 누군지 헷갈리겠네, 혼자 웃음도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창밖을 내다보니 우리 집 바로 옆 케빈네 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너무 놀라 파자마 차림인 것도 잊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이 벌써 경찰차와 소방차들이 골목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케빈은 출근을 했는지 보이지 않고 맞은편 길 위에 그레이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 뛰어갔다. 하나 둘 달려 나온 다른 이웃들도 그레이스와 아이들에게 물을 갖다 주고 필요한 게 없는지 살폈다. 그날따라 더 가냘파 보이던 그녀의 어깨를 모두들 감싸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지, 그레이스는 정말 죽을 뻔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케빈이 일하러 나간 후 다시 잠들었던 그녀는 화재 경보음을 듣고서야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빠져나왔던 것이다.

미국에 와서 이웃의 화재를 본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처음 이웃에 불이 난 걸 본 건 시카고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우리 집 옆 아파트 건물의 지붕이 낙뢰에 맞아 갑자기 불길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고 집도 많이 타지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집에 붙은 불을 보는 건 매우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숨 가쁘게 움직이는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을 접하고 그들의 노고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케빈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불이 나기 전날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밤늦게까지 파티를 하고 새벽에 휴지통에 버린 초들 중 채 꺼지지 않은 불씨가 다른 것에 옮겨 붙었을 거라고 했다.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던 가족 모두 제때 작동한 화재경보기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케빈의 가족은 주방과 거실 등 심하게 불에 탄 1층이 복구되는 동안 마침 비어있던 이웃집에 세 들어 지내기로 했다.

바로 옆 집이었던 우리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함께 있던 어른들의 "그만하기 다행이다"는 말씀이 몹시 든든했다. 타지에 살면서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았던 나는 어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함을 오랜만에 느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둘째는 외할아버지와 한글 공부를 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아빠는 둘째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한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둘째는 처음엔 호기심에 잘 따라 하더니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하자 도망을 다니기도 하고 온몸을 비비 꼬며 지루해하기도 했다. 그래도 하루도 안 빠지고 꾸준히 가르쳐주신 아빠 덕분에 둘째는 식당 메뉴판의 한글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중학교에 가서는 K-pop의 열풍이 불자 한국어를 알아가는 재미에 더욱 빠져들더니 한글로 문자 메시지도 주고받게 되었다.

지금도 서로 만날 때마다 둘째가 외할아버지한테 한글을 배우던 이야기를 하며 웃게 된다. 외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한글을 익힐 수 없었을 거라며 둘째도 몹시 고마워한다. 둘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한,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들과 아쉽게 헤어지고 얼마 후 돌아온 할로윈 데이 ⎯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동네 아이들의 명랑한 "Trick or treat!"(사탕 안 주면 장난칠 테다) 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고 사탕이나 초콜릿 한 움큼씩을 나누어주었다.

낯익은 목소리에 나가보니 케빈과 그레이스, 아이들 모두가 소방관 옷차림으로 우리 집 앞에 서있었다. 반가움과 유쾌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들은 이웃에 걱정을 끼친 게 미안해서 부주의를 반성하는 뜻으로 소방관 코스튬을 골랐다며, 화재로 손상된 집의 공사도 잘 마무리되어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던 케빈네를 향한 안쓰러움과 걱정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생명이 위험할 뻔했던 힘든 일을 겪고도 밝고 강한 모습으로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그들에게서 오히려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매년 할로윈 무렵이면 그 해 여름 북적이던 우리 집과 소방관 가족 케빈네가 연달아 떠오르곤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