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된다

The Show Must Go On

by Anna Lee

내 기억이 맞다면, 대학교 1학년 때 수강했던 교양영어 첫 번째 챕터는 'The Show Must Go On'이었다. 개인적인 슬픔을 감춘 채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처럼, 우리도 삶이라는 무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어진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살면서 가끔 이 문장이 떠오르곤 하는데, 2020년 갑작스럽게 마주한 팬데믹 때가 그랬다.


2019년 말부터 우한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더니 2020년 초에는 여기저기서 이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원인 모를 폐렴을 일으켜 감염자, 특히 많은 노약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이 바이러스가 바로 코로나19였다.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을 선포했다.

지인들의 부모님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는 생각보다 매우 얇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덮쳐올 수 있는 게 전염병이었으며, 죽음 또한 그러했다. 나만은 특별하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운명을 직시한다면 그리고 우리를 초월하는 존재가 정말 있다면 그런 바람이야말로 헛된 망상이 아닐까.

첫째가 살고 있는 뉴욕에서는 연일 비극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코로나19로 *락다운이 되어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첫째로서는 몹시 불안하고 힘든 나날이었다. 뉴욕으로 가볼 수도 시카고로 오랄 수도 없는 상황이 못 견디게 답답했다.

시카고는 그에 비하면 평온했다. 마치 '에이, 설마..', '뭔 뜬금없는 전염병?' 이러고들 있는 것 같았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프리스쿨이라, 나는 같이 일하는 동료 교사들에게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2020년 3월, 점점 퍼져가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 시카고도 락다운이 되고 말았다. 학교와 오피스 등이 폐쇄됨에 따라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가 시작되었고,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러 나가는 일 외에는 집 밖 외출도 제한되었다. 하루아침에 집에 갇혀 SNS와 영상통화로 말고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시간이 두 달 넘게 이어지자, 우편물을 갖다 주거나 물건을 배달해 주는 메일맨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락다운이 시작될 무렵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던 둘째는 근처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캠퍼스를 떠나라는 학교의 지시로 마치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일하던 프리스쿨 역시 휴교령으로 문을 닫았다.

끝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는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이 모든 일이 황당하기 그지없었고, 이럴 땐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누가 알려주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때는 비행기를 타는 일조차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가 시작된 곳이 중국이라고 알려지면서, 이곳에서는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번져 갔다. 하루하루 가족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도 모자라, 안전까지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마스크 착용을 거부했으며, 마스크를 사러 마트에 간 남편을 직원이 마스크 팩(facial mask) 매대로 안내해 줄 정도로 마스크에 대해 무지한 사람도 많았다. 추운 겨울이면 엄마가 모자와 장갑, 그리고 마스크를 챙겨주던 우리네 어린 시절이 새삼 고마웠다.


6월, 락다운은 풀렸지만 나는 일하던 프리스쿨로 돌아가지 못했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의 위세 속에, 가족들은 나의 복귀를 반대했다. 안 그래도 센터 아이들한테 옮은 감기를 늘 달고 살던 내가 다시 돌아가 일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긴 고민 끝에 결국 가족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디렉터에게 퇴사 의사를 알렸다. 문을 열어놓을 테니 언제든 돌아오라는 그녀의 말이 나의 무거운 마음을 안아주는 듯했다. 한동안 나는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이 너무 그리워 그들이 나오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팬데믹이 가져온 경제적 타격을 남편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살던 집을 팔아 일부를 남편의 일에 충당하기로 하고 이사를 준비했다. 여러 가지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거래가 잘 이루어질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마켓에 내놓은 지 두 달 만에 우리 집을 사겠다는 임자가 나섰다. 그렇게, 우리는 십여 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리고 사람들과 이야기로 가득했던 정든 집을 떠났다.

둘째는 첫째에게로 가 뉴욕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언젠가는 해야 한다고 계획했던 이사와 아이들의 독립이 팬데믹으로 인해 앞당겨 이루어진 셈이었으나, 일터였던 프리스쿨에 이어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별이었다. 나는 갑자기 텅 빈 품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팬데믹의 막바지쯤 나는 브런치와 만났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삶을 글로 옮기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이들을 따라 뉴욕으로 옮겨 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도 고맙다. 어쨌든 무대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내 삶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 Anna Lee


* 락다운(lockdown): 이동과 활동을 제한하는 봉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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