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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May 19. 2022

시연과 민수

첫 번째 이야기

향긋한 꽃 내음이 코 끝을 간지럽히고 대지의 공기가 진한 봄 냄새로 꽉 차는 계절이다.

개나리가 흐드러진 낮은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걷던 시연은 문득 민수를 떠올린다.

봄과 개나리와 골목길이 만나는 그곳 어딘가 옛날과 이어지는 블랙홀이 있을 것만 같아, 시연은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시연은 유치원에 들어갔다. 피아노와 미술 위주의 커리큘럼으로 운영되는 동네 유치원이었다. 베레모와 빨간 리본 타이가 잘 어울리는 네이비블루의 원복은 시연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유치원은 집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었지만, 어린아이였던 시연에겐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어느 집 대문 밑으로 날카로운 개 짖음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후로는, 시연은 유치원 가는 길이 무섭기만 했다.

혼자서 유치원에 못 가겠다고 징징대는 시연을 보다 못해 시연의 엄마는 이웃에 사는 민수에게 아침마다 시연과 유치원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다.


민수는 시연의 단짝 친구다.

시연보다 키가 훨씬 큰 민수는 말로는 늘 시연에게 밀렸다. 시연과 말싸움을 하다 막히면 갑자기 "어쩌고저쩌고 말방귀!"를 외치며 달아나곤 해서, 시연은 민수를 '말방구'라고 불렀다.

그 '말방구'가 흔쾌히 시연의 가드가 돼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시연은 별로 미덥지 않은 마음으로 민수를 따라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민수는 모퉁이를 돌아 엄마들의 시선을 벗어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시연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야, 같이 가!" 시연이 소리침과 동시에, 마침 지나던 철대문 밑으로 왕왕 개 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잔뜩 으르렁대는 날카로운 이빨까지 보였다. 개는 당장이라도 대문 아래로 튀어나올 듯한 기세였다.

"엄마야!" 시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앞서가던 민수가 어느새 돌아와 시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괜찮아. 빨리 가자!"

그러고 보면 민수는 언제나 시연의 편이었다. 어눌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해서 시연에게 늘 놀림을 당하면서도 민수는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제일 싸움을 잘하는 승훈이가 시연을 놀리면 민수가 나서서 시연 편을 들어주곤 했다.

시연은 새삼 민수가 멋있어 보였다.


유치원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포크 댄스 시간이 이어졌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짝이 되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시연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선생님의 귀에 대고 말했다. "선생님, 저 오늘 민수랑 짝 할래요."

댄스 시간이 시작되기 앞서, 선생님은 시연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의 짝을 바꿔 주셨다.

그날 시연은 민수와 짝이 되어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다시는 민수를 말방구라고 놀리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시연의 가족이 이사를 했다. 시연과 민수는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지만, 엄마들끼리 친해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가끔은 민수가 너무 좋아서 설레기도 했고 어른들한테 남자 친구가 있다고 자랑도 했지만, 시연은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는 민수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둘은 점점 더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만났을 땐 아예 데면데면했다.

이런 둘을 보고 엄마들은 "너희 뭐야? 왜 이래? 말 좀 해봐" 하고 웃으며 놀렸다.


'시연과 민수, 두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annalee13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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