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교실 밖이 갑자기 소란했다. 선생님과 우리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마침 수업이 끝날 즈음이라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 시간을 마쳤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다른 반 아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우리를 경악케 했다.
우리 학교 옥상 한 구석에는 조그만 토끼우리가 있었다. 생물 선생님께서 애지중지 키우시던 토끼가 스무 마리 남짓 되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토끼를 보곤 했다. 귀여운 토끼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힘든 일이 있는 날엔 천진난만한 토끼들을 위안 삼기도 했다. 토끼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춘기를 지나던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다. 우리는 스스로 당번을 정해서 선생님과 함께 토끼를 돌봤다.
우리가 한창 수업에 열중해 있던 그때,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이 학교에 들어왔다. 수위 아저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고 한다. 아이들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계단을 올라 옥상에 갔다. 그리고 옥상 한쪽에 있던 토끼우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토끼들을 우리에서 꺼내 아래를 향해 던졌다. 5층 높이 옥상에서 학교 건물 뒤편 화단으로 떨어진 토끼들은 모두 죽었다.
수업을 진행하던 중 이상한 소리에 나갔다가 아이들을 발견한 생물 선생님은 그들을 모두 교무실로 데려가셨다. 왜 그런 짓을 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가누가 빨리 떨어지나 경기를 했다고.
여섯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아이들이 토끼가 죽을 것이란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토끼는 그저 놀잇감이었을 뿐,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즉시 연락을 취하셨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그 시간에 동네를 배회할 수 있었는지 그 후로 우리는 듣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교무실에 갔다가 생물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토끼들이 죽어가던 모습을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다. 생물 선생님의 참담한 표정과 선생님들의 망연자실한 모습, 교무실의 그 무거웠던 공기가 잊히지 않는다.
어릴 때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토끼를 키우셨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헛간 같은 곳에 작은 토끼우리가 있었다. 잠깐 시골집에서 지낼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매일 토끼 밥을 주러 가던 기억이 난다. 헛간에서 나던 풀 냄새와 나무로 만들어진 토끼우리를 기어 다니던 빨간 무당벌레도 생각난다. 루비처럼 빨간 눈에 털이 새하얀 토끼들은 꼭 구름 같았다. 내가 풀을 주면 작은 코와 입을 씰룩거리며 잘 받아먹던 모습이 생생하다.
사고가 있던 날, 나는 시골집의 그 토끼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해칠 마음이 없던 죄 없는 동물들이었다.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다시는 그 예쁜 모습들을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토끼들을 보내 주어야 했다.
한동안 그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만 보아도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걸까 알 수 없었다. 선량함이란 것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보다 약하고 힘없는 존재를 보살필 줄 안다고 믿었던 내 마음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우리는 그렇게 꽤 오랫동안 아파했다.
총격 참사로 미국 전역이 슬픔에 빠져 있는 가운데 NRA(전미 총기협회)의 연례 컨벤션 행사가 텍사스에서 버젓이 열렸다. 총기 전시회까지 한다니, 유가족들과 공동체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또 다른 폭력이다. 한편에선 총격 사고 당일 경찰의 늑장 대응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경찰이 롭 초등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교내로 진입하기까지 한 시간을 지체했다고 한다. 폭력 앞의 비겁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역사 속의 수많은 전쟁과 학살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말해 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니더라도 차별과 따돌림, 학대 등의 폭력을 주위에서 적잖이 접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존을 위한 공격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본능적인 공격성을 제외하고도 우리 안에 감추어진 타인을 향한 증오와 폭력의 욕구는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내 안에 오랫동안 묵혀온 분노, 덮어놓고 잊어버린 상처는 없는지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무심코 한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는지, 편견에 사로잡혀 다른 이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은 돌이켜봐야 할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히 주는 상처가 안에서 곪아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드러나는 비극은 없어야 하겠다.
그날 영문도 모르고 가엾게 죽어간 토끼들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우리가 잘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생명이 소중한 세상,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