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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27. 2022

일과 나

누군가 취직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를 축하해 주는 동시에 내가 취직하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2018년 가을, 그동안 일하던 곳을 떠나 좀 더 많은 아이들과 접할 수 있는 프리스쿨을 알아보기로 했다.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잠깐 쉴까 하는 유혹이 생기기도 했다. 완벽하지 않은 나의 두 번째 언어(second language)를 생각해 보면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늘 일에 목말라했다. 잠깐이라도 쉬면 긴장이 풀려 나태해질 것 같았다.

우선, 온라인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넣고 누구나 볼 수 있게 오픈해 두었다. 그리고 매일 사이트를 방문해 내가 원하는 조건과 부합하는 곳이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미국에 와 5년째 되던 해, NACES(National Association of Credential Evaluation Services)에 학위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를 보내 인증을 받아두었다. 우리나라에서 받은 학위가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정되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취업에 필요한 과정을 더 이수할지 말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 받은 학위가 모두 인정되어 학교를 더 다닐 필요는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오롯이 살림만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바깥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살림과 육아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그 외에 나만의 세계를 갖고 싶었다. 그러기엔 현실적인 문제들이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내가 일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아이를 돌봐주는 문제로 엄마와는 말다툼이 잦았다. 큰 아이가 세 돌이 될 때까지 나의 일과 삶은 양쪽 어머니와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나는 일과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집도 아이들도 좋았지만, 일을 그만두면 나 자신을 영영 잃을 것 같아 두려웠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만큼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나 자신도 잘 데리고 살고 싶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5, 6년간 줄곧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미국 학교가 궁금했고, 사람들과 만나 영어 실력도 늘리고 싶어서였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의 학습을 돕는 엄마 도우미부터 점심시간 후에 갖는 야외놀이시간 도우미, 교사들의 개인 우편함 정리, 복사, 학습자료 정리, 도서관 업무,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 등을 했다. 아이들의 글을 집에 갖고 와 읽어보고 맞춤법과 페이지 수를 체크하여 개인 문집 만들기를 도와주는 일도 해보았다. 나의 영어 튜터이자 친구였던 니키가 일하던 학교에서는 클래스룸 파티에 쓸 팝콘까지 튀겨 보았다.

자원봉사로 했던 일들은 부담 없고 재미있었다. 학부모들이 시간을 내어 학교에 와 일해주는 것에 대해 교사들도 굉장히 고마워했다. 학기가 끝나면 자원봉사를 했던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모여 작은 파티도 했다.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편히 살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 것이 나중에 일을 찾을 때 뒷심이 되었다.


이력서를 넣고 며칠이 지나자, 새로 오픈하는 프리스쿨 몇 군데에서 이메일로 오퍼가 들어왔다. 대부분 우리 집과 멀었고, 일에 비해 페이가 적었다.

내가 일하고 싶은 프리스쿨 대여섯 군데에 이력서를 보냈고, 그중 두 곳에서 연락이 왔다. 인사를 담당하는 사람과 먼저 전화 인터뷰를 한 후 현장에 가서 인터뷰를 해야 했다. 한 군데는 내가 생각한 아이들의 연령과 맞지 않아 정중히 거절했다. 나머지 한 군데는 우리 동네가 아닌 옆 동네라 운전해서 좀 가야 했지만, 전화 인터뷰 느낌이 좋아서 한번 가보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마지막 이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마음도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앙의 홀을 중심으로 0-5세 반 10개 교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디렉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센터를 훑어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깔끔하고 아늑했다.

요가를 하기 위해 중앙 홀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본 순간,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뒷등을 타고 머리로 뜨겁게 올라왔다.

디렉터와 인사를 나누고 교실에 들어가자 온사이트 인터뷰가 진행됐다. 아이들과의 상호작용, 교사들과의 의사소통 등을 평가받는 자리였다. 나는 가장 어린 영아반과 4세 반에서 임시 교사가 되어 온사이트 인터뷰에 임했다. 두 시간 정도 걸린 온사이트 인터뷰가 끝난 후 오피스에서 디렉터와 인터뷰를 이어갔다. 스무 개 정도의 질문이 주어졌다. 대답이 좀 궁할 땐 디렉터가 나를 살짝 도와 유연하게 넘겨주었다. 채용 여부를 떠나,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언제부터 일할 수 있겠냐는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보충 서류들을 제출하고 급여 인터뷰까지 마친 날은 내 생일이었다. 기쁨이 배가 되었다.

1주일 뒤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센터 문을 나서는데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 무렵 첫 취업에 성공한 큰 아이와 기쁨을 나누었다.

1주일 후 센터에 첫 출근을 했고 팬데믹 직전까지 2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락다운 이후 센터로 복귀하진 않았지만 아이들, 같이했던 교사들과 슈퍼바이저들, 디렉터 모두가 그립다. 많이 배우고 나누었던 좋은 시간들이 내 삶의 서랍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일은 우리 삶의 가치를 높여준다. 나의 재능과 세상의 필요가 만나는 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출근하는 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거울 속의 나에게 웃어주던 기억이 난다. 밥벌이를 할 수 있어서,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어서 뿌듯했다.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날도 있었지만,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온사이트 인터뷰를 하던 날 4세 반에서 한 아이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네 살 아이와 떨던 수다, 그 아이의 해맑은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아이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며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이 나를 기억할 순 없겠지만, 그들의 마음 어딘가에 내게서 받았던 느낌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남았으면 좋겠다.

내 품에 안기고 또 나를 안아주었던 그들의 감촉이 나에게도 한없이 사랑스럽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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