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두 주인공의 죽음을 빚어내는 비극적인 결말의 이유가 주인공들 사이의 갈등이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을 둘러싼 두 가문에 연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극이 전개될수록 몬테규와 캐플릿 가문의 저주가 영롱한 젊은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극적 상황에 통탄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극 속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하며 이들의 사랑이 결국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리라는 암시를 전달한다. 이처럼 주인공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플롯이 진행되게 함으로써 결국 이 두 연인들을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운명’이라는 것은 외부적으로 강력한 사회적 세력만이 아니라 이 두 연인들이 그러한 힘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주관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작품을 관통하는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는 두 가문 사이의 묵은 원한만큼이나 젊은 연인들에게는 두려운 것으로 특히 여주인공 줄리엣이 겪게 되는 어려움과 갈등의 뿌리가 된다.
당시 캐플릿 부부가 추진한 줄리엣의 결혼은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관례적인 것이었다. 결혼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교환’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강했으므로 결혼 당사자가 특히 여성의 처지에서 상대를 결정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면과는 별개로 줄리엣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존중해야 할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자신의 소유로서 이전 가능한 존재로 여겼다. 그는 패리스 백작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줄리엣에게 불같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거둬들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일방적 내침으로 인해 소통을 포기한 줄리엣은 ‘가짜 죽음’으로만이 아버지와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자 로미오에 대한 정조를 지키는 길이라고 여기게 되며, 로렌스 신부의 계획에 동조하게 된다. 줄리엣은 어린 만큼 순수하였으며 스스로 자주성을 포기하고 길들여지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 있게 소신껏 행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로렌스 신부는 이 연인들이 진정한 사랑을 통해 두 가문의 원한을 없애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줄리엣이 패리스 백작과의 결혼식 전날 밤부터 48시간 동안 죽은 자처럼 잠들 수 있는 비장의 약을 조제해준다 그럼으로써 결혼을 피하고 장례를 치른 후 무덤에서 줄리엣이 다시 소생하여 행복한 결말을 맺게 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줄리엣이 로렌스 신부의 충고를 따라서 이러한 거짓 죽음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줄리엣이 속한 가부장적 사회가 부과하고 있는 성의 양극화로 인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연인들의 재앙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계획의 차질로 인해 로렌스 신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로미오에게 하인이 찾아와 줄리엣의 죽음을 알리고, 로미오는 연인 곁에서 죽고자 달려와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 이후 깨어난 줄리엣은 독약을 마시고 죽은 로미오를 발견하고 자결함으로써 죽은 로미오와 영원히 하나가 된다.
셰익스피어 희극의 여성들은 탁월한 성품과 적극적인 성격으로 사랑과 결혼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극을 행복한 결말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비극의 여주인공들은 강한 여성이든 순종적인 여성이든 극 전체의 비극적 전개의 일부분으로서 무기력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사랑과 관련하여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를 거부하는 비극의 여주인공들은 체제나 권위에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면에서 줄리엣은 희극과 비극의 여주인공이 지니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연인들의 비극적 사랑과 죽음은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파괴적인 억압과 그로 인한 순수한 젊은이들의 반항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국 극을 관통하는 비극적 요인들 가운데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사랑을 이루고자 정공법을 찾지 못하고 이들을 두려움에 우회하게 한 줄리엣의 아버지에게 이 아름다웠던 연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